너무 조이면 부러지고, 너무 풀면 놓친다
아버지는 유난히 '의지'와 '노력'을 강조하셨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길에서 결국 스스로 자신을 의지하며 헤쳐나가야 하기에, 내가 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 듯 굳은 표정과 엄숙하고도 날카로운 어투 때문인지, 어린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위협감을 느끼곤 했다. 마치 노력하지 않으면, 의지가 남달리 강하지 않으면, 뭔가 커다란 불행을 당할 것만 같은 암울한 예감이 들었다.
그 불안이 나의 성장 과정을 지배했다. 공부든 뭐든 강박적으로 열심히 했다. 좋은 결과가 따르기도 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대학 시절부터 일찍이 번아웃이 찾아왔고, 회사를 다닐 때는 무리하다 병이 나 몇 달간 휴직하기도 했다. 맹목적으로, 세뇌당한 듯 불안에 쫓겨 열심히 했지만, 그 노력은 나의 진심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목표를 달성해도 허무함이 뒤따랐다.
그래서인지 최근 몇 년간 '의지'나 '노력', '인내'라는 단어를 들으면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단어들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내 마음이 평화롭고 몸이 피로하지 않을 만큼만,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하자. 어쨌든 마음이 편한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은 편해졌지만, 점점 게을러졌다. 청소를 미루고, 운동을 포기하고, 계획한 일도 자꾸 미뤘다. 임계치 한참 아래에서 깨작거린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다시 무리하기는 싫어서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다.
'이게 내 한계야. 이제 한계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부드러운 몰락을 배우자.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잖아. 비우고 줄여나가야 해.'
마치 엔트로피 법칙에 순응하는 무생물처럼, 생명력을 피우기보다 스스로 퇴화시키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힘을 빼는 것'과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가 원한 건, 과부하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꾸준히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삶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었다. 무리했다가 탈 났던 기억들이 약간의 고통과 불편함조차 피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어느새 느슨해지다 못해 헐거워졌고, 생활의 절도와 절제도 무너져갔다.
무엇보다 걱정인 건 체력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니 근육이 빠지고, 자세도 망가졌다. 다리를 꼬지 않으면 앉아 있기 불편해졌다. 밤이면 어깨와 허리가 뻐근해 이불속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지속할 수 없어.'
나이 탓, 두뇌 탓, 능력 탓, 내 탓, 남 탓... 탓만 하며 하나씩 포기하는 일이 늘어날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지난주 독서모임 뒤풀이 자리였다. 우연히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운동 마니아들이 포진해 있었다. 두 시간 넘도록 이어지는 운동 예찬을 듣다 보니, 어느새 나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몇 년째 수영과 등산을 해온 사람은 "체력 걱정은 안 해요."라며 웃었다. 또 다른 사람은 "고백하자면, 전 하루에 두 번 헬스장에 가요. 아침엔 달리기, 저녁엔 웨이트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뭐라고? 하루에 두 번?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텐션이었다. 내 옆의 사람이 덧붙였다. "전 직장동료들과 퇴근 후 운동을 함께 해요. 제가 좀 쪼는 편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내가 물었다.
"그런데 근력 운동하고 나면 근육이 너무 땅기고 아프잖아요. 그럴 때 무슨 생각이 드세요?"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제대로 힘이 들어갔구나. 이 생각이 들면서 너무 기분 좋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렇다. 자신의 성장에 기뻐하고 감탄할 수 있어야만 불편을 견디며 지속할 수 있다.
근육이 손상과 회복을 반복하며 성장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몸이 느끼는 일시적 불쾌함에 겁을 먹고 있었다. 이 또한 '노력'에 대한 두려움, '균형 잡힌 노력'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두려움과 무지는, 해낼 수 있는 일조차 미리 포기하게 만든다.
관계에서도 그랬다. 나와 결이 다른 사람들을 피했다. 상처받을까 봐. 오해가 생길까 봐. 하지만 다르다는 것은 사람을 이해할 기회이자, 새로운 관점과 소통 방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쉽게 선을 그은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마음의 그릇도 조금씩 좁아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공부도, 일도, 편안한 정도로만 한다면 그 너머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한계가 아닌 것을 한계로 착각하고 기회를 놓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결국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한계를 돌파하는 것도,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해야만 의미가 있다.
최근 들어 나는 인생의 '순한 맛'만 골라왔던 것 같다. 그런 시기를 겪을만도 했다. 너무 꽉 움켜쥐다가 탈이 나고 그 과정에서 상처받곤 했으니까. 게으름의 이면에는 상처로 인한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움켜쥠과 느슨함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배워야 할 때라고, 삶은 속삭이고 있다.
너무 조이면 부러지고, 너무 풀면 놓친다. 예전엔 고통을 견디는 법만 배웠다면, 이제는 고통이 나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 관찰하고 느끼며 조율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내가 되어갈 테니까.
독서 모임 다음 날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역시나 운동을 하고 나자 온몸이 뻐근했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이내 '나도 제대로 힘을 썼나 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꽤 괜찮았다.
불편함은 이제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