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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안녕 Jan 16. 2022

마당의 주인

길냥이들의 영토 싸움


'밥때'가 배를 채우고도 떠나지 않는다. 얼핏 얌전한 식빵 자세로 보여도, 녀석의 곤두선 귀와 레이저라도 쏠 것 같은 눈빛에서 위태로운 긴장감을 엿본다. 녀석의 아침 순찰로 평화로웠던 윗 마당 공기에 서릿발 장막이 쳐진 듯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휴전 선언이 파기될지,는 인간이자 참관인인 나는 가늠할 수 없다.

밥때의 적수인 '흰발'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오늘이 영토 전쟁 일주일 째다.


마당의 평화

엔진 소리를 한길 가에 흘리며 바쁠 것 없이 달리는 스쿠터, 메가폰을 앞세우고 뜸 들이며 지나가는 고물장수 트럭, 뽕나무 잔가지를 점령한 물까치 떼의 악다구니, 무심히 매달려 딸랑이는 처마 밑 풍경... 여느 시골과 다를 것 없이 특별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하염없이 흘러가도 모를 백색소음들. 이리도 나른하게 옹크린 겨울 마당을 뒤흔든 건 몇 분의 시간차를 두고 출현한 두 녀석 때문이었다.


 

작년 봄부터 가끔 밥 동냥하며 드나들던 고등어등 무늬 녀석에게 나는 '밥때'라 이름 붙여주었다. 엄밀하게는 길냥이들과 안면 튼 순서에 따라 성의 없이 붙인 호칭이니 녀석은 아마도 '밥때 4'쯤 될 것이다. 나와는 일 년째 눈인사를 하고 밥을 나누는데도 서운하리만큼 거리두기에 철저하다. 

몇 군데 더 빌어먹을 집을 따로 지정해두었는지 불규칙적으로 드나들던 녀석이 지난겨울부터는 하루 두세 번씩 찾아와 밥을 요구했다. 요즘 들어서는 식사를 마친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마치 제가 성주라도 된 냥 시야 확보석에 앉아 집 주위를 한참 동안 감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종종 가벼운 푸닥거리는 있었지만 우리 집의 두 마당 냥이인 '또'와 '뭉'과는 적절히 데면데면한 것 같아 나도 그 이상 주의를 두지는 않던 터였다.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한 달 전부터 마당에 새롭게 등장한 길냥이 한 마리가 일으킬 파란은 예상 가능했다. 꼬리가 잘린 듯 뭉툭하고, 양 뒷발이 흰 장화를 신은 것 같아 '흰발'이라 이름 붙인 녀석은 갓 성년기에 접어든 듯한 수컷 고양이였다. 초기에는 간간이 나타나 아랫마당을 금세 가로질러 사라지더니 최근 들어서는 현관 앞까지 다가와 기웃거렸다. 슬쩍슬쩍 다른 고양이들이 남긴 사료 몇 알을 비우고 떠나길 서너 차례, 드디어 외나무다리에서 밥때와 맞닥뜨린 것이다. 수상쩍은 젊은 라이벌의 등장을 밥때가 당연히 반길리 없었을 것이다.





 

첫 번째 전투지는 대추나무 아래 수돗가 쪽이었다. 유리창마저 불안하게 진동시키는 괴이한 울음소리, 아기 울음을 닮은 구애음이 아니라 고양이들의 으르렁대는 겨루기 울음이 분명했다. 혹여나 비교적 순둥 한 편인 '또'와 '뭉'이 엮인 판은 아닌가 염려된 나는 고양이 걸음을 하며 소리 나는 곳을 살폈다. 다행히 또와 뭉은 없었다. '밥때'와 '흰발', 두 수컷 길냥이들의 전선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현관 앞에서 내가 차려준 아침 식사를 하던 밥때가 뒤이어 마당에 들어선 흰발을 발견하고 길목을 막아선 형국인가 보았다. 녀석들이 위협성 울음만 반 시간 넘게 주고받는 통에 조마조마 지켜보던 나는 한겨울 야외 추위에 첫 번째 패자가 되어 격투장을 물러났다.

  

다음 날은 길냥이들의 단골 식당이 된 현관 앞에서 대치중인 녀석들을 목격했다. 전날보다 더 밀도를 높여 일촉즉발의 기세로 맞서고 있었다. 틈새가 보이면 어느 쪽이 먼저랄 것 없이 덮칠 결기로 울음소리에는 위태로운 절규마저 서려있었다. 

쨍하게 얼어붙은 마당의 허공을 그어대던 울음소리는 오래지 않아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들을 드러낸 본격적인 싸움으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혈투였다. 털 뭉치가 난분분하고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는 대혈투!


나는 무책임한 관전자가 될 수도, 주제넘는 참견자가 될 수도 없는 난감한 처지에 섰다. 두 녀석을 엄히 나무라고 내 마당에서 내쫓을 권리 장정을 찾아 머릿속을 뒤졌지만, 자연계의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를 저어하는 소심한 인간이 나임을 확인만 할 뿐이었다. 물론 평소처럼 비인간 동물들에게 위력을 오남용하는 비겁함도 부릴 수 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사태에는 나의 개입이 미칠 성과가 지극히 일시적이고 미미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런 변명을 달고 녀석들이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나는 다시 슬그머니 물러났다.


한참 뒤 붉은 핏자국을 하얀 목덜미와 배에 훈장처럼 찍은 밥때가 돌아와 현관 유리문 앞에 앉았다. 물그릇에 남은 물로 목을 축인 후 가슴츠레한 눈빛으로 사방을 예의 주시하며 제 영토를 사수한 승리자의 자리를 지켰다. 

나는 밥그릇에 공물을 채워 경배하듯 조심스럽게 밥때의 발치에 내어주었다. 피 묻고 찢긴 갑옷이 안쓰러웠지만 그 이상 연민은 보이지 않기로 했다. 그날 밤 마당에 눈이 내렸다. 

        




 

다음 날 먼저 등장한 녀석은 흰발이었다. 녀석은 주변 경계에 혼을 반쯤 나누고도 내가 바치는 공물을 오래도록 취했다. 패자부활전을 각오했는지 속을 든든히 하고도 흰발은 무대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밥때가 왔다. 둘은 다시 바리케이드도 없이 대치했다. 위협의 저음과 두려움의 고음이 불협화음으로 뒤섞여 허공을 갈랐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흰발이 물러났다. 녀석은 다음 날에는 보이지 않았다. 

 

또 새날은 왔고, 눈은 녹아도 디딤돌에 새겨진 핏자국은 남아 있다. 마른 잔디 사이로 뜯긴 털 뭉치들이 무겁게 나뒹굴 뿐 다툼의 흔적은 여전히 그대로다. 

오랫동안 거리낌 없이 뜰을 활보하여 왔을 나는 오늘은 고양이가 되어 낮은 눈꺼풀로 주위를 살핀다. 바람이 분다.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이 마당은

나의 땅이며, 

내가 가꾸고 돌보는 뜰이며, 

터를 잡고 사는 주인은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 보다

 

경계가 지워질수록 불안해지기는 녀석들도, 나도 마찬가지다. 바람에 묻어온 냄새를, 바람에 감춰진 움직임을, 바람에 숨어든 소리를 구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일깨운다. 겨울 마당이 숨죽인다. 


저기 흰발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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