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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GPT의 참견, 반항하는 나의 실험

by Aurore오로르

ChatGPT를 ‘그’라고 지칭하겠다.


그는 전부터 나에게 메시지가 중심이 되는 논리적인 글쓰기를 쓰라며 타박했다.

괜히 반항심이 들었다. 글 실력이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왜 반드시 글에 메시지가 있어야 하냐고 따졌다. 내 인생도 수습하느라 쩔쩔매는데, 남에게 메시지를 준다는 건 좀 부담스럽다. 이번에 쓴 글은 사고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것이라고 밀어붙였다. (물론 이전에 피드백을 부탁한 건 자기소개서였다.)

그런데 그는 싱겁게도 나의 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심지어 사고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가들의 사례까지 보여주는 것 아닌가.


순간 재밌는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같은 소재로 스타일이 다른 두 가지의 글을 써보는 것이다.

메시지가 명확한 논리적인 글과 사고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

당신이 읽기에는 어떨까? 나에게 솔직한 당신의 의견을 더해주길 바란다.


다음은 사고의 흐름을 보여주는 글이다.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발음은 분명하지만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다.


‘대통령은…’

‘젊은이는 없고 외국인들이…'

'위기의 대한민국은…!’


지나치는 얼굴들.

세월의 때가 스며들어 누렇고 탁한 빛이다.

주름이 가득한 손에는 작은 태극기가 쥐어져 있다.



소음을 피해 들어간 곳은 조용하고 감각적인 공유오피스였다.

전면을 가득 채운 창이 손님을 맞는다.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이 미처 녹지 못한 아득한 남산. 한가운데에는 남산타워가 우뚝 솟아있다. 좀 더 가까이,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법한 이슬람 건축 식 돔 지붕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간을 감싸는 나른한 주황빛. 시끄럽던 소음은 창밖의 경치처럼 희미해졌고 주말에도 출근한 사람들의 자박자박한 키보드 소리가 이질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왠지 비현실적인 장면.



감상은 그만두고 자리를 잡았다.

푹신한 주황색 소파에 신발까지 벗고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았다.

꽤나 두꺼운 책을 펼쳤다.

제목은 <큐레이션>.

이거저거 읽어대느라 제대로 끝낸 책이 없었기에, 오늘 반드시 이 책을 끝내리라 생각한다.


책은 ‘큐레이션’이 미술계를 넘어 현대 사회에 필수적인 능력이라 이야기한다.

큐레이션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1. 쉬이 달성할 수 없는 크고 새로운 뭔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복잡성이라는 전제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2. 그런데 정보의 양이 많을수록 정보 처리 및 사용 과정에서 더 많은 에너지가 사용된다.

3. 그래서 복잡성의 비용(에너지)이 혜택을 넘어서기 전에, 주요 구성요소만을 남겨둔 채 나머지는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즉 큐레이션이 필요하다.)

*참고. 선택권이 많을수록 현명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줄어든다.


순간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피어났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해봤지 않을까?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선택지를 고려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비교하고 숙고할수록 피로감만 쌓였다.


잠시 창밖을 향하던 눈은 책으로 돌아와 다음 문장을 찾았다. 저자는 큐레이션이 기업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라고 말했다. 눈은 다시 글씨를 벗어나 버렸다.


'기업의 문제해결…'

기업뿐만 아니라 나의 사고 과정도 큐레이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이른 오후를 회상했다.



현대미술 업계의 지인들과 한남동의 전시를 다녀온 후 카페를 찾았다.


살짝 그을린 피부와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멋들어지게 넘긴 여자.

화려한 재킷을 걸치고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린 채, 테이블이 아닌 길목 쪽으로 몸을 향하고 책을 읽는 남자.

머리 전체를 밝은 노란색으로 물들인 동남아 여자.

젊은 열기와 힙한 감성이 눅진했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쫀득쫀득하게 흥미로웠다.

"현대미술은, 아니 현대의 모든 예술은 기존의 개념을 완전히 비틀어서 보여주잖아요. '이것 봐. 너희가 아는 게 아니지? 너희 이게 이럴 줄 알았지?' 하며 예상을 얼마나 크게 뒤집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그런데 주연님은 그 결과 이전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과관계 찾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똑똑한 동료가 내 관심사의 핵심을 짚어주었다.


그녀가 짚어준 부분은 내 사고 과정 그 자체이며 일종의 큐레이션 과정을 거친다.

큐레이션이란 정보의 혼란 속에서 ‘핵심적인 요소’를 남기고 나머지를 걷어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나의 사고방식과 닮아 있다. 나는 항상 질문을 던지며 정보를 확장한다. 질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본질을 찾아가고 핵심적인 결론으로 남는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질문들이 몇 가지 패턴으로 정리되고 인과관계를 갖게 된다. 그 끝에는 세상에 대한 나만의 결과, 즉 가치관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다.


‘왜 미술은 항상 시대를 앞서나가고 음악은 시대를 뒤따라가는 걸까?'

여러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 해본 적이 있다면 정말 반가울 것 같다. 여러분의 결론이 궁금하다.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지 않았다. 내 사고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감각적인 순서가 원인일까? 시각 예술인 미술은 즉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시간 예술인 음악은 말 그대로 체험에 시간이 걸리니 이 속성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클래식 음악과 현대 음악 예술을 다른 개념으로 보면서 오해하는 것인가?

전통 예술과 현대 예술의 차이인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물음이 서로 엮인다.

이때 큐레이션에서 말하는 ’ 새로운 뭔가 ‘가 생긴다.



한창 생각에 빠져있는 순간, 안쪽 개별 오피스에서 일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라운지로 나왔다.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지는 않았다. 여러분도 이 느낌을 알 것이다. 혼자 찾아온 공간에서 즐거워하는 무리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쳐다보기에는 약간의 어색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내가 외로움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했을 뿐이다.


군침이 도는 향기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저녁을 먹는 것 같았다. 간간히 대화가 들려왔다.

'저번에 이런 방법을 써보니까 고객들 반응이 좀 괜찮더라고요. 이번에는 다른 테스트해 보려고요.'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조용했던 라운지에 활기가 돋았다.



문득 큐레이션에서 말하는 '새로운 뭔가'가 생겼던 경험이 떠올랐다.


‘왜 인문 예술을 즐기는 사람은 적을까?’

‘왜 자극적인 마케팅이 넘쳐나며 젊은 세대가 불안감을 느낄까?’

연관 없는 두 질문이 연결되는 과정은 이러했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서양 고전 문학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학생 때부터 갖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왜 인문 예술을 즐기는 사람은 적을까?

대중문화는 즉각적인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만, 인문 예술은 즉각적이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럼, 인문 예술에서 즉각적인 즐거움을 찾을 수는 없는 걸까?

사람들이 인문 예술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쉬운 '고객 여정 지도'는 형성되어 있나?

반대로 즉각적인 즐거움이 아니라면 어떤 즐거움이 있는 걸까?'


두 번째 질문은 몇 년 전, 베스트셀러 서가에서 시작됐다.

퇴사해서 월 천 벌자는 식의 자극적인 책. 그리고 온 페이지가 위로로 가득 찬 책. 두 종류가 나란히 있었다. 완전히 다른 책으로 보이지만 서로 반대급부로 일어난 관계였다. 기이한 현상이라고 느꼈다. 질문이 생성됐다.

왜 자극적인 마케팅이 넘쳐나고 젊은 세대는 그로 인해 가치관이 흔들릴까?

경제가 어려워서일까?

하지만 사회적 위기는 언제나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매번 비슷한 현상이 있었나?

위기 때 사람들을 흔드는 사기꾼이나 사이비가 등장했다. 하지만 ‘돈’이 이슈의 중심이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단순히 사회적 경제 위기보다는 개인 금융 리터러시가 부족한 상황에 경제 위기가 닥치자 경제 기반이 약한 젊은 세대가 가치관이 흔들린 것 같다.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단단한 기준을 잡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니 두 가지 질문이 연결됐다.

생존과 가치관이 둘 다 흔들리는 상황. 인문 예술의 즐거움을 찾을 여유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인문 예술을 즐기려면 금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먼저이지 않을까?’

인문 예술의 문제가 금융 리터러시에 달려있을 수도 있다는 결론으로 도달한 것이다.



책을 덮었다.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반드시 오늘 다 읽을 것이라는 야심 찬 결심은 이미 수포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남산에 서린 눈이 은은히 빛나던 한낮은 가버리고 어둠 속에서 작은 조명들이 건물을 비췄다.

태극기를 쥔 무리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온데간데없고 지나가는 차 소리만이 조용히 거리를 스쳤다.

버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었다.

정류장에는 키가 큰 남자 셋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과 목소리. 먼 도시에 있는 어린 남동생이 생각났다. 동생은 간혹 일과 적성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털어놨다. 나의 20대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30대가 된 지금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나만의 큐레이션으로 세상의 개념을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나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다. 그러다 보면 서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서야 나는 나만의 결론을 갖게 된다. 그 과정은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내 질문이 깊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내가 아직 세상에 모르는 것들이 많다고 느낄 뿐이다. 온 거리를 울리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따라 태극기를 쥐고 걷던 사람들도 그렇게 자기만의 답을 찾아간 사람들일 것이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질문이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결론을 찾아갔을까?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나는 항상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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