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탕비실이에요. 임원들 오시면 메모해 놓은 거 보고 차 드리면 되고,
손님 오시면 그때그때 알아서 주세요."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처음 사무실에 온 날이었다. 자리배치를 받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앉아있는데 직원 하나가 날 데리고 가서 임원들의 성향에 따른 각종 차 종류를 알려주었다. 처음 보는 직원이 알려주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음에도 당연하게 여겼던 임원의 차 심부름. 물론 지금은 이런 일은 없겠지만 갓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으로서 가졌던 기대감이 무색하게 아침 일찍 출근하여 임원들의 차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에 적잖은 실망을 했었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대학 졸업식도 하기 전에 운 좋게 취업이 되어 처음 사회인으로, 직장인이 됐던 날.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날. 어찌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매일매일이 처음이지만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 날.
'탕비실'이라는 단어도 장소도 어색했고, 쥐 죽은 듯 조용했던 그 날의 사무실 분위기도 도무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지금까지 해 왔다고 하니 당연하게 해야하는 일이었다. 회식자리 참석이나 야유회 등도 업무와 마찬가지였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요구하지 않았다. 누군가 지시하면 그저 해야할 뿐이었고, 해내야 했다. 그게 처음이었고 어찌보면 회사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런 곳에서도 지내다 보니 첫 날 보다 둘째 날이, 둘째 날보다는 셋째 날이 편해졌다. 자존심 상했던 차 심부름도 당연한 것이 되었고, 나중에는 다른 직원들이 임원의 성향을 묻기도 했으니 아마도 그것이 '적응'이 아니었을까 싶다. 회식 참석은 당연했고, 상명하복이라는 위계질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보다 시키는 걸 해내는 것에 급급했다.
그런 일들이 사회생활이었고, 직장인의 고단함이라는 이유로 친한 누군가와 술을 한잔 마셨고, 틈틈이 수다를 떨며 이겨냈던 것 같다.
'처음'이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 '적응'에 따른 어려움도 다를 것이다. 어찌 보면 몸을 써야 하는 밖에서의 고된 노동이 아닌 사무실에서의 업무였기에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명언처럼 지내왔을지 모르겠다.
나이를 불문하고 '처음'과 '적응'은 세트로 다닌다. 갓 돌을 넘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때도 '적응기간'이라며 한 달이 필요했다. 직장인도 새로운 회사에 입사를 하면 다시금 그곳에 나를 녹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 똑같아 보이는 업무지만 회사 나름대로의 처리 방식이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특색이 각기 다르다. 게다가 같은 일을 하더라도 회사마다 사용하는 시스템이 다르다 보니 경력직들도 이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바로 노동현장에 투입되는 인력들은 오죽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20대. 한창 꽃피워도 부족할 시기.
폐기물 파쇄기 기계에 끼어 생을 마감하기에는 한없이 아까운 청년. 잊을만하면 들리는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고된 노동.
누구에게나 있는 처음과 적응이 세상을 등진 그에게도 있었을 텐데, 우리 사회는 얼마만큼의 시간을 줬을까 생각해봤다.
누군가 그에게 당연한거라며 업무를 알려줬고, 지시를 했으며 적응도 하기전에 시킨 일을 했어야만 하는 어리숙한 청년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열악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노동현장에서 그저 어른들이, 선배들이 시키는 일을 처음도 적응도 함께 견뎌내야 했을 노동자였던 그의 죽음이 더할 나위 없이 슬프다.
타인의 죽음을 간과할 때 우리의 품격은 손상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은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