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이 아니라, 무책임의 전통
한국이 베트남보다 발전한 나라라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베트남의 사회보험 환급 절차를 직접 겪어보니, ‘발전’이라는 말에 대해 새삼 느껴졌다.
작년, 이전에 등록되어 있던 회사의 퇴사 절차를 마치고 그동안 납부했던 사회보험금 일부를 환급받기 위해 신청을 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환급은 신청 후 1년이 지나야 가능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외국인 신분으로, 그것도 개인이 항의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리 없었다.
1년을 기다린 뒤, 다시 1시간 반의 대기
정해진 1년을 꼬박 기다린 후, 드디어 환급을 받으러 갔다.
찾아간 곳은 의외였다. 허름한 주택의 1층을 임대한 사무실. 에어컨도 없고, 사람들은 종이 쪽지를 접어 만든 대기표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내 차례가 돌아왔다.
서류를 받고, 여권을 제시하고, 지문을 찍고, '환급신청 확인서' 한 장을 건네받는 것으로 절차는 끝났다.
나를 도와 주기위해 같이 동행한 돈치킨 매장의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게 사회보험 환급 절차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되물었다.
“한국은 어떻게 해요?”
“한국은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자동 환급돼.”
“그럼 그건 한국이 발전했네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건 한국이 더 발전했다고?’ 그럼 다른 건 베트남이 더 낫다는 뜻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말엔 어떤 ‘자존심’ 같은 게 있는 듯 하다. 그들에게 한국은 부러운 나라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뒤처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린 우리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는 것이다.
‘기다림에 관대한 나라, 베트남’
일주일 뒤 환급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1년을 기다렸는데, 또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믿고 기다렸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결과에 대한 메일도, 입금도 없었다.
그 날 저녁이 되어 매니저에게 말하니 그는 말했다.
“정말요? 내일 아침에 같이 가보죠.”
그의 말은 늘 그랬다. 느긋하고,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아니 어쩌면 당연하다는 체념의 습관화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기다림조차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느림을 자유라고 부른다.
오늘 아침 10시가 훌쩍 지났는데도 매니저에게서 문자 메시지 하나 없다. 환급신청 확인서를 다시 살펴보니 전화번호가 있길래, 가기 전에 전화를 한 번 어떻겠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30분 정도가 지났을까? 매니저가 우리 매장을 찾았다. 같이 가자고.
택시에 올라 "왜? 문제가 있는 것이냐?"고 묻자, 매니저가 전화를 해보니 "작은 문제가 있다"며 직접 와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외국인이라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 된다'고 하려는 건 아닐까?'
'혹시 언더머니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선물이라도 사서 가야하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면서도 우선 가서 무슨 일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사무소로 향했다.
그래도 전화를 사전에 해서 그런지 담당 직원은 대기도 없이 바로 서류 한 장을 내게 건네었다.
'엥 이게 뭐지?' 다시 환급 신청서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외국인용 신청서에 작성을 해야 하는데 내국인용 신청서에 작성을 했기 때문에 접수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인가!'
황당할 뿐이었다. 1.여러 서류들을 비치해 놓은 상황에서 내가 골라 서류를 작성한 것도 아니고, 담당자가 직접 건네준 신청서에 작성을 했는데 그게 잘못되었다고? 2.서류 양식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접수를 할 때 지적을 하고 제대로 된 용지에 작성을 하게 해야 하지 않는가! 3.그 날은 그렇다 하더라도 접수를 할 때 문제를 발견했다면 신청서에 적은 전화번호와 이메일로 바로 사실을 통보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4.결과일이라고 한 당일에 결과가 처리되지 않았다면 메일과 전화로 통보를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5.외국인과 내국인용 신청서를 잘못 선택해 새로 작성해 달라고 한 양식을 보니 외국인용은 모두 베트남어 이고, 기존에 썼던 내국인용은 베트남어 밑에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더 황당했다. '그냥 접수를 안 해 놓고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의 말도 안 되는 실수로 일주일을 허비했는데 저급 공무원들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어쩔 수 없이 꾹 참고 서류를 새로 작성하고 제출하는 그 순간에도 옆 자리에서 신청서를 붙잡고 기록사항을 묻는 서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슨 취조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래도 돈을 내어주는 자는 공무원들이고, 작은 돈이라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시민이니 모두들 그 모습에 익숙한 듯 하다. 하기야 나도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면서도 바로 담당자에는 웃음을 지으며 서류를 건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틀간 반나절을 오가며 다시 서류를 내고,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단지 환급 한 번 받는 일인데, 그 과정에서 나는 내 시간을 잃었고, 내 인내심을 시험받았다. '필요한 사람이 결과도 다시 체크해야 하고, 서류도 새로 작성하는게 맞는거 아냐?'라며 공무원이 나를 비웃는 듯 그런 경험이다.
내 생각에 베트남 행정의 가장 큰 문제는 ‘느림’이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다. 서류가 잘못되어도 아무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너희(시민)를 도와주고 있는 건데, 그럴 수도 있지'라는 표정으로 넘긴다. 이런 태도는 결국 사람들에게 ‘포기와 체념’을 가르친다. 일이 잘못되어도 따지지 않고, 기다림이 길어져도 그냥 익숙해진다.
나는 지금도 이 나라가 싫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 행정만큼은, ‘느림의 미학’이 아니라 ‘무책임의 전통’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기다림은 자유일 수 있지만, 그 자유가 누군가의 시간과 불편 위에서 이루어질 때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