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게릴라전의 초대 영웅
호찌민시의 사이공강(현 호찌민강) 근처에는 쩐흥다오 장군 동상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에는 해군본부가 위치해 있다. 이는 쩐흥다오 장군이 단순한 전쟁 영웅을 넘어, 베트남의 국방과 독립을 상징하는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쩐흥다오 장군은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자주 비견된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물리친 명량해전의 주인공이라면, 쩐흥다오 장군은 절대적인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몽골 제국의 막강한 군대를 물리친 베트남의 민족 영웅이다.
쩐흥다오 장군의 전술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베트남은 지형적 특성을 살린 게릴라 전술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 역사에서 막강한 몽골 제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쩐흥다오 장군의 업적은 단순한 군사적 성공을 넘어, 베트남 민족의 독립 정신을 상징하는 사례로 남아 있다. 베트남 역사상 막강 몽골 제국군과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민족 영웅이 된 쩐흥다오 장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북부, 특히 하노이 북부 지역은 산지와 숲을 활용한 전술을 펼치기에 적합한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 북부는 평야와 산지가 혼재하고 있는데, 하노이는 베트남의 북부 평야의 중심에 위치하지만, 하노이 북부와 주변 지역에는 산악과 숲이 혼재한다. 그 예로 바비(Ba Vì) 산맥은 하노이에서 북서쪽으로 약 60km 떨어져 있으며, 숲과 산지가 혼합된 지형이다. 또한 탐다오(Tam Đảo) 산악지대는 하노이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숲과 고지대의 지리적 환경이며, 당시 하노이 북부 지역은 열대 기후로 인해 과거에는 울창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다. 정글처럼 밀도가 높은 숲은 몽골군과 같은 기마 중심의 군대에게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쩐흥다오 장군은 몽골 제국의 침공(1285년, 1288년) 당시, 북부 산림과 강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게릴라 전술로 전투를 이끌었다. 몽골군은 대규모 기마병 중심으로 구성되어 숲과 산악 지형에서의 기동력이 제한적이었다. 이에 쩐흥다오 군대는 작은 부대 단위로 나뉘어 숲과 산악에서 매복하고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홍강 델타 지역과 그 북쪽 산악 지역은 몽골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기습을 가하는 데 적합한 지형을 이용한 것이다. 이는 쩐흥다오의 전술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박당강 전투(1288년)가 있다. 쩐흥다오는 박당강 하류에 나무 말뚝을 설치해 몽골 함대를 유인했고, 썰물로 인해 갇힌 몽골 함대를 매복 병력으로 섬멸했다. 이 전투로 몽골군의 해상 진격을 완전히 저지하고 대월의 독립을 수호하게 된다.
하노이 북부 지역은 과거 숲과 산악이 풍부한 지형으로, 쩐흥다오 장군이 몽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도시화와 농업 확대로 많은 숲이 사라졌지만, 바비와 탐다오 같은 국립공원이 그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베트남 북부 지역은 지형적 특성과 전술적 활용에서 큰 가치를 지닌 지역으로, 게릴라전이 역사적으로 효과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쩐흥다오 장군은 숫적 열세 속에서도 "쿠빌라이의 머리를 대궐 아래에 매달고, 토곤의 살점을 장안 한복판에서 썩게 하자"는 강렬한 구호로 부하들을 독려하며 나라를 지켰다. 이는 전쟁의 승패가 단순한 무기와 병력의 문제가 아닌, 전투원과 국민들의 의지에 크게 달려 있음을 상기시킨다.
쩐흥다오 장군의 전술과 승리는 당시의 전쟁사에서 독보적이다. 그는 지형과 자연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압도적인 적을 물리쳤고,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 정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오늘날에도 베트남인들에게 강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