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피플의 여정 : 해방된 땅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1975년, 전쟁이 끝났다. 베트남은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수십만 명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망명자'라 부르지 않았다. 다만,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해방 직후, 왜 탈출이 시작되었나?
전쟁이 끝난 후, 남베트남 출신 군인, 공무원, 지식인, 사업가들은 '승자의 정의' 아래 재교육을 명령받았다. 사유재산은 국유화되었고, 직업을 잃었고, 자유로운 이동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남베트남 정권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 모두가 '새로운 베트남'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다로, 정글로, 국경 너머로. 처음에는 항구도시에서 작은 보트에 몰래 올라탔다. 어떤 이들은 캄보디아 국경을 넘다 총에 맞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가족과 생이별한 채 밀림을 헤매기도 했다.
'보트피플'이라는 이름은, 그들의 탈출 수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허술한 목선, 부서진 고깃배, 어떤 배는 애초에 바다를 건널 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탔다. 남아 있어야 할 이유보다, 떠나야 할 이유가 더 컸기 때문이다.
남중국해 한가운데에서, 보트피플들은 굶주림과 갈증, 폭풍을 견뎌야 했다. 때로는 해적을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협당했다. 때로는 어느 나라의 해군에도 구조되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조용히 사라져 갔다. 생존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국제 사회의 반응
1978년 이후, 보트피플 문제는 국제적 인도주의 위기로 떠올랐다.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은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유엔은 난민 수용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홍콩, 태국의 해변에 닿은 뒤에도 수용소에서 몇 년씩 대기해야 했다.
고국을 떠났지만, 새로운 땅이 바로 안식처가 되어준 것은 아니었다. 바다를 건넌 후에도 보트피플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서 다시 삶을 시작해야 했다. 낯선 언어, 낯선 법, 낯선 차별.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이 벅찼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지에 뿌리내린 수많은 베트남계 공동체가 그들의 끈질긴 생존을 증명하고 있다.
탈출은, 해방의 또 다른 얼굴
4월 30일을 '해방의 날'로 부르는 나라가 있다. 그러나 같은 날을 '망명의 시작'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누구에게나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 바다를 건넌 사람들, 그리고 건너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진정한 해방은 무엇인가?
다음 편은 「남북 분단의 역사 : ‘하나였던 베트남’은 존재했는가」로 이어진다.
베트남은 원래 하나였을까? 남북의 분단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