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더십 코리아 5월호의 홍보 이미지 (출처: 한국리더십학교)
모든 걸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은 (이렇게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과하다. 부담스럽다. ‘독서를’ 하고 시작하는 문장을 ‘하고 싶다’가 아닌 ‘해야 한다’로 마무리 짓는 사람들에겐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들 중 몇몇은 내게 묻는다. 기껏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읽은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으면 읽은 보람이 없지 않으냐고. 삐딱하게 들릴 수 있지만 책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작은 불씨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의 질문이다. 한 권의 책에 들어간 노력과 지식, 지혜와 감정을 존중하는 사람이자 책 구매에만 매달 7~10만 원을 투자하는 애서가로서 반가울 따름이다.
답변을 정성스레 준비하고픈 마음에 먼저 나의 독서 생활을 되돌아보았다. 매년 내 나이 수만큼의 책을 읽겠다고 연초 계획을 세운 지 5년째에 접어들었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인들에게 독서감상문을 나눈 것도 4년이 넘었다. 출간 작가나 독립 서점 주인장들과 같은 다독가와 애서가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작가 축제나 도서전, 팟캐스트 녹음 현장, 저자 사인회 등에도 참 열심히 참여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완성형은 아니겠지만) 나만의 독서법이라 부를 만한 걸 곁에 두고 지낸다. 여러 시도 끝에 단단히 밴 굳은살 같은 것들로, 독서법의 정답은 아니더라도 공유해 봄직한 경험담이다. 애초에 독서법에 정답이란 게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2023년의 1분기를 떠나보낸 지금, 새 계절에 새 결심을 세우려는 사람들, 작은 불씨 하나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과 나누고픈 이야기다.
지저분하게
학교는 내게 책을 모시라고 가르쳤다. 가까이할수록 좋다며 혹여나 책을 해치려는 생각이 든다면 생각을 고쳐 먹으라고 다그쳤다. 깨끗하게, 소중히. 자연스레 어느 위생용품의 광고 문구처럼 책을 대했다. 교과서를 깜빡했다는 친구에게 책을 빌려줄 때마다 “어이구,“ 하는 추임새와 함께 ”깨끗하게 쓰고 돌려주어야 해!” 하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자를 대고 반듯하게 밑줄을 긋거나 형광펜을 들었고, 낙서와 필기처럼 독서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은 따로 마련한 공책에 사용했다. ‘아껴 읽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가까이했던 책이더라도 새것처럼 깨끗한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는 경우가 많았다. ‘상태 좋음’에 체크 표시를 해 중고시장에 팔아도 될 정도였다. 완독을 했다는 뿌듯함도 잠시, 과연 내가 이 책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관계'를 맺었던가 하는 낯선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 내 곁에는 활자를 사랑하는 아빠가 색연필 하나, 연필 하나, 만년필 하나, 인터넷 사전 (때로는 전자 사전)을 준비물로 챙긴 채, 신문과 책을 읽고 있었다. 아빠가 어떤 글을 읽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건 쉬웠다. 앞서 밝힌 독서 준비물들이 줄과 줄 사이, 쪽 여백 사이마다 흔적을 남겨두었다면 그 글은 아빠가 읽은 글이었다. 단어의 뜻이나 한자가 적혀있는 메모에서 뭐든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려는 아빠의 꼼꼼함이 보였었고, 럭비공을 닮은 동그라미나 파도 물결을 닮은 밑줄에선 이 문장을 기억하고 싶다는 아빠의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아빠가 책을 구입해서 읽고 덮기까지의 과정이 페이지마다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쩌다 나중에라도 다시 그 책을 펼쳐보면 책을 읽을 당시의 아빠와 책 간의 대화가 다시 재생될 것만 같았다. 아빠가 읽은 책들은 살아 있었다.
좋아 보이는 것은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고 후회도 없다는 생각에 나도 책 한 권을 챙길 때 필기구 하나를 같이 집어 들었다. 이때 필기구란 본문보다 메모를 더 도드라지게 하지 않고 흔적이 옅은 연필이거나 색연필이었다. 특별한 장소나 시기에 구입한 책이거나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면 표지를 넘긴 후에 나오는 색지에 '2022.10.10 로마에서’와 같은 정보를 적었고,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문장엔 물결을 그린 뒤에 ‘ㅋㅋㅋ’하는 메모를 달았다. 혹 페이지 전체가 마음에 쏙 들 경우엔 책의 귀퉁이를 돼지 귀처럼 크게 접어 두었고, 생각해 봄직한 질문을 읽으면 알록달록한 인덱스가 책등으로 삐죽 튀어나오게끔 붙이고선 독서 중에 드는 생각을 짧게나마 쪽여백에 메모해 두었다.
하나씩 하나씩, 책과 함께 노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랬더니 책이 참 지저분해졌다. 누가 봐도 읽은 티가 나는 책,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읽은 책이 완성되었다. 뿌듯함이 배가 된 것은 물론, 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에는 잊어버렸을법한 에피소드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 기억나? 우리 그랬었잖아!” 하면서 기억 저편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친구와의 대화처럼, 책과의 추억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자발적으로
(비난하려는 건 아니지만) 독서 경험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 건 학교였다. 학교는 책을 모시는 데서 더 나아가, 책과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라고 가르쳤고, (질리지도 않는지) 독후감 숙제를 매번 내주었다. “줄거리 요약으로 시작해서 느낀 점, 내게 주는 교훈으로 끝낼 것!” 융통성 없게도 템플릿도 정해져 있었다. 책에 따라 교훈적이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억지로 내게 적용할 만한 시사점을 찾아야 한다니, 고역이었다. 어쩌면 수많은 독후감 숙제 때문에 ‘책을 읽었으면 응당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야지!’하는 의무감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기록의 목적이 꼭 기억에만 있진 않지만, 기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남기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투영된 활동이니 말이다.
대학생이 되자 독후감의 굴레에서 조금 벗어났다. 과제라는 이름의 또 다른 명령이 떨어졌지만 적어도 초중고등학교 시절만큼 꽉 막힌 템플릿이 주어지진 않았기에 내 맘대로 글을 구성하는 재미가 있었다. 당시에는 또 이전에 알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졌는데, 특별히 소셜미디어와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의 개발로 1인 미디어처럼 활동할 수 있는 점과 기록을 하는 게 훨씬 더 쉬워진 점이 눈길을 끌었다. 때마침 지저분하게 읽는 게 습관이 되어 이야기에 관한 애정도 더 커져 있었던 터라, 독후감이라고 꼭 선생님께 제출해야 할 필요는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독서 경험을 기록해 보자고 스스로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쓰는 독후감을 효과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우선 기술의 힘부터 빌리기로 했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했고, 나만의 단독 해시태그나 도메인을 만들어 아카이빙의 기능을 (어설프게나마) 갖추었다. 독후감의 구성은 책과 맺는 관계에 따라 다르게 했다. 맘에 들었던 문장을 옮겨 적는 것이 전부였을 때도 있었고, 독서 후에 떠오르는 그림이나 다른 콘텐츠를 소개하거나, 학창 시절 독후감 템플릿의 일부를 차용하기도 했다. 가급적이면 줄거리 요약을 최소한으로 줄여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평이 남도록 했다. 그래야 오로지 나의 독후감이 될 테니까.
조금씩 연습했다. 책과 관계를 맺는 아주 사적인 경험인 독서가 (선생님을 포함한) 남들 보라고 쓰는 글이 아닌 나를 위한 글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아, 그 책 나도 읽었는데 말이야, ' 하면서 샵(#) 뒤에 놓인 단독 해시태그를 눌러 언제든지 열람 가능한 독서기록장을 소환할 수 있을 거라면서. 그 덕에 등장인물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를 책 속에서 만났을 때의 첫인상은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었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티테이블 앞에서 가볍게 화두를 던질 여유를 갖추게 되었다.
함께
좋은 걸 나만 알고, 나만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압도하는 ‘너무 좋아!’ 하는 감탄이 있을 때 마법이 일어난다. 좋아하는 것을 자랑하고, 함께 나누고 싶어지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거나 생각을 품은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된다. 관련 커뮤니티가 있다면 괜히 그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팔로우나 구독의 성격을 띤 버튼을 꾹 누른다. 좋았던 기억을 가진 공통의 대상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새로운 것도 경험해 보자며 ‘제2의 공통의 대상‘을 찾아 나선다. 하나의 원(씨앗)에서 가지가 하나씩 돋아나고 커다란 벤다이어그램(한 그루의 나무)을 키우 시작한 거다.
책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고 그를 사적으로 기록하게 되자 독서를 좀 더 심도 있게 즐길 수 있는 장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클럽, 북살롱, 서평단, 서포터스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독서 커뮤니티였는데, 가입 절차나 회원비, 활동 과제, 기간 등에 따라 그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문턱은 높지 않았다. 하고 싶다면 흔쾌히 받아주는 개방적인 분위기가 대부분이었다. 내 경우, 2020년 1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코로나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한달에한권 이란 해시태그와 월말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통해 정기 모임을 갖었던 김영하북클럽이 첫 북클럽이었다.
북클럽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오롯이 혼자 채워나간 책장 한편을 클럽장이나 같은 신분(?)의 회원들에게 내어주고 그들에게 북 큐레이션이란 권한까지 주겠다는 결심을 의미했다. 평소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책들, 보지 않으려 했던 책들이 장바구니에 담기고 서재에 들어서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정리하는 '개안'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혼자 하는 독서가 취향의 탑을 덤덤히 쌓아가는 작업이었다면, 함께 하는 독서는 나와 다른 취향의 탑을 발견하고 그 탑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여행과 같았다. 간혹 나의 탑을 구경하러 오겠다는 북클럽 회원들이 있으면 교통편을 알아봐 주고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겠다는 생각에 설렘으로 프레젠테이션 같은 것을 준비하곤 했다.
책을 향한 애정은 비슷하나, 책을 읽은 뒤의 감상이 저마다 다르기에 분명 같은 책을 읽었어도 회원 수만큼의 다양한 독후감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즐거움으로 남았다. 책과의 관계 또한 사적인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입체적이고 다층적으로 바뀌었고, 다른 이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이전보다 쉬워졌다.
아까 내게 질문했던 그에게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꼭 이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제 경험은 이랬어요.” 라면서 수줍게 세 가지 키워드를 나열하는 것이다.
지저분하게 (읽고), 자발적으로 (쓰고), 함께 (나누고).
혹 그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면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까. “손에 들린 책과 함께 보낼 시간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와 대화하려고 한답니다. 책과 나는 동등한 입장이에요. 책이 제게 훈계를 하거나 수업을 하려 해도, 저는 책에게 대뜸 장난부터 칩니다. 밑줄을 긋고, 특정 단어를 색칠하고 빈 공간에 메모도 하죠. 어색한 분위기에서 던지는 센스 있는 농담 같은 거라고 할까요.”
“책과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책에게 애정이라 부를 만한 게 생겼다면 이것저것 질문하고 기록해 둡니다. 누가 시키는 작업도 아니고 꼭 해야만 하는 작업도 아니니 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되어요. 하지만 학생 때처럼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 기록하는 게 아니니 즐겁게, 오로지 사적인 동기만을 갖고 몇 자 적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방금 읽은 문장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저런 콘텐츠를 떠올렸다, 하고요.” 방금 한 말을 그가 메모장에 받아 적는다면 긍정적인 반응이라 생각하며 마지막 키워드를 이야기할까 한다.
“이 모든 감상을 혼자 간직해도 되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과 나눈다면 한 겹 짜리로만 보였던 감상에 결이란 게 생겨요. 다른 층을 이루거나 다른 질감을 가진 그 결 덕분에 한 권의 책이 여러 권의 감상으로 분화된답니다. 나만 이런가, 할 때 옆 사람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는 걸 알고선 안도하거나 힘을 내고 문제 해결에 좀 더 박차를 가했던 적 없나요?” 긴 독백을 닮았을 위 답변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추가 질문을 해올지 기다리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읽고 싶다면 제 경험을 조금이라도 참조해 주세요. 기쁠 거예요.” 하고서.
덧붙이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가 부담스럽고 지루하게만 느껴진다면, 필자보다 훨씬 더 혜안이 있는 지성인들의 독서 경험을 참조하거나, 책과 함께 하는 삶의 기쁨에 관해 찾아보는 건 어떨까? 혹시 모르니 참고도서 세 권 정도 적어두겠다.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저, 2017, 위즈덤하우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저, 2008, 여름언덕)
『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2020, 윌북)
정기적으로 매거진 리더십 코리아에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편집장님의 허락 하에 해당 글의 전문을 브런치에도 옮겨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래 글은 매거진 리더십 코리아의 2023년 5월호에 실린 기사로 원문 링크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m.klschool.co.kr/mag1.php?mode=view&bid=2617&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