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슴이 되었다. 한국에서 유럽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마음이 콩알만 해졌고, 환승지인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부터 손이 닿는 곳이든 닿지 않는 곳이든 미니 자물쇠와 옷핀을 채워 걸기 바빴다. 그런데 이제 막 '공식 짝꿍'이 된 남편은 조금 달라 보였다. 생애 첫 유럽 여행이 시작되었는데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환승지에선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를 읽으며 기다리겠다고 탑승 게이트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여권 심사대 직원이 방문 목적을 묻는 질문에 '허니문!'하고 답할 정도로 들떠 있었고(그 덕에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새가슴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곧장 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유럽 땅을 밟자마자 마스크부터 과감히 벗어버렸다. 유럽 여행 경험 다수의 새가슴 옆에 유럽은 난생처음인 강심장. 조합부터 색달랐다.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의 이름을 딴 고속 열차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에 몸을 실었다. 30분을 달리던 열차가 멈춘 곳은 종착역이란 뜻의 이름 간판을 내걸고 '이곳은 세상의 모든 길이 통하는 곳이오. 모든 길의 끝이란 말이오.' 하며 근엄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로마 테르미니 역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이나 파리 북역처럼 기차가 들어오는 방향으로만 선로가 뚫려 있고 도착 방향으로는 선로가 막힌 공간. 승강장에 내려 로마 시내로 향하는 출입구로 나가기까지는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릴 수 있는 구조였지만, 모두가 열차에서 하차하자마자 한 방향으로 걸어야 했기에 출구 찾기가 쉬웠다. 역사 대신 곧바로 하늘을 마주하고 있는 선로 덕에, 승강장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으로도 로마의 햇살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기운을 넘어서 따갑다고 느껴질 정도의 빛이 이마 위로 쏟아졌다. 로마의 10월은 여전히 여름 같았다.
무사 도착의 기쁨도 잠시, 새가슴은 유럽의 기차역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크로스로 맨 가방 끈을 다시 한번 질끈 쥐었다. 기차역이 어딘가, 시간표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이 아닌가. 이른 아침과 늦은 새벽까지도 수요와 공급이 넘쳐나는 곳, 사람이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 이 중에는 분명 소매치기범과 노숙자, 호객 행위를 하는 '어떤 무리들'도 섞여 있겠지. 백팩에 크로스백, 그리고 오른손에 케리어까지 끌고서 오돌토돌한 로마의 마차길을 가로질러야 하는 상황. 숙소에 체크인을 하기 전까진 안심해선 안 되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전략은 있었다. 관광객 티를 내지 않고 가급적이면 유럽에서 공부하는 유학생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눈에 덜 띄는 복장과 언행으로 테르미니 역을 지난다면 로마에서 나쁜 기억을 만들 확률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마련한 전략이었다. 독일과 벨기에에서의 경험을 돌이켜 보건대 가난한 유학생이라면 제아무리 기차역의 ‘어떤 무리들’이라도 가볍게 여길 대상은 아니게 된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걸어서 10분이랬지?”
“응. 이쪽으로 가면 돼.”
새가슴과 강심장은 10월의 ‘여름’ 기운을 손등과 선글라스로 가리며 당차게 걷기 시작했다. 테르미니 역의 매끄러운 보도블록이 끝나고 로마의 돌길이 시작되자 캐리어 바퀴에서 드르륵 소리가 크게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