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 만세, 마르코 만세

로마, 이탈리아

by 프로이데 전주현

'짧게나마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게 여행이다'란 모토에 평소 공감을 표하는 나는 여행 계획 단계에서 호텔 보다 에어비엔비와 같은 민박 옵션을 좀 더 검색하고 시도하는 편이다. 많이들 찾는 호텔 숙소가 왠지 편안지 않았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침구와 화장실이 새것처럼 정리되어 있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내가 치우고 간 거면 모르겠지만). 나의 흔적이 최소한으로만 남아 있는 숙소라니, 다시 친해져야만 할 것 같다(마구 부대끼면서). 지낸다거나 (잠깐이지만) 살고 간다는 느낌보단, 머물다가 결국 떠나버린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니 괜히 쓸쓸하기까지 하다.

이에 비해 민박 옵션은 훨씬 인간적이다. 숙소 상황에 따라 부엌을 사용할 수도 있고, 호스트와의 교류도 가능하다. 환영 인사와 지역 안내, 지금껏 만난 숙소 손님들의 이야기, 호스트가 되기까지의 사연까지... 스몰토크 수준일지라도 호스트와 한두 번 섞는 말 중에 은근히 많은 게 내포되어 있다는 걸 경험해 볼 수도 있다. 호텔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호스트에게 돈을 지불하는 고객 입장이지만, 그 집에 초대받은 손님이란 인상이 강하다.

여행 기간 동안 내가 머물 곳이 누군가의 집이었고,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집이라는 점 또한 여행 중 숙소 내에서의 내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곳이 그저 비 피할 어느 숙소가 아니라, 누군가의 취향과 누군가가 일평생 익힌 문화가 한껏 묻어나는 공간이란 점에 설렌다. 그런 곳에 머물다 보면 나의 취향을 질문하고 나의 생활공간을 돌아보게 되는데, 이 또한 호텔 숙박 시엔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것들이다.

공간적 사유! 민박 숙소에 머무는 여행의 최대 장점이 바로 그거다.



세계인의 관광지인 로마에 좋은 호텔이 왜 없으랴. 하지만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고급 호텔도 역사가 길다. 한국인이 응당 기대할 법한 깔끔하고 모던한 호텔보다는 조금 낡고 오래되었지만 주요 랜드마크까지의 접근성이 좋은 호텔들이 대부분이다. 최고급 호텔을 예약하면 모를까, 민박과 호텔 간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 민박 여행에 관한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던 나는 이탈리아 신혼여행의 첫 번째 숙소로 호텔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짧지만 강력했던 유럽에서의 유학 생활이 많고 많은 에어비엔비 숙소 중에 맘에 쏙 드는 숙소(게다가 예산을 넘지 않는!)를 골라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테르미니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Urbana라는 이름의 길에 위치한 한 아파트먼트를 예약했다. 숙소의 호스트인 마르코와 연락을 미리 취하면서 이탈리아 입국 일정을 공유하는 등 무사 체크인을 위한 사전 작업을 하나둘씩 해두었다.

그리고 결전의 날(마르코와 약속한 체크인의 날)! 캐리어 두 대와 백팩 두 개가 테르미니 역에서 콜로세움 쪽으로 뻗어 있는 마차길바닥 위를 드르륵드르륵 긁기 시작했다. 구글맵 로드뷰로 예습한 그대로 파워워킹을 했는데, 돌아보니 생전 처음 걸어보는 도시를 몇 년 살아본 사람처럼 활주 하다시피 걸었다. '일단 이 캐리어를 손에서 떼어 놓아야 콜로세움이든 뭐든 눈에 들어올 거 아니야.' 혹시 모를 소매치기 사태를 경계하느라 캐리어 두 대와 백팩 두 개는 숙소를 찾아가는 내내 마음과 걸음에 날이 잔뜩 서 있었다. 한인마트가 번듯한 건물 1층에서 영업 중인 것도 눈으로 쓱 보고 지나치는 상황, 나와 남편은 구글맵 로드뷰를 떠올리며 걸음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건너면 된다. 어?' 숙소가 위치한 Urbana 길로 진입하기 위한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눈앞에 문전성시를 이룬 젤라토 가게 하나가 보였다(마음과 걸음이 날이 선 와중에도 젤라토는 못 참나보다. 아니면 이때부터 내심 마음을 놓았던 걸까?).


"우리 체크인 완료하면 자축하는 의미에서 젤라토부터 먹을까?" 캐리어 한 대와 백팩 한 개가 다른 캐리어 한 대와 백팩 한 개에게 제안했다.

"좋지!" 하는 화답에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인디 핑크로 벽면을 칠한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길, Urbana였다. 드르륵드르륵 캐리어 바퀴 소리가 여전히 멈추지 않는 상황. 자그마한 과일 가게와 햄버거 가게, 파스타 가게, 편집숍, 현금인출기 등을 지나치고 나서야 116이라는 숫자 앞에 멈춰 설 수 있었다. "잠시만, 초인종 벨 뭐 눌러야 되는지 확인해 볼게." 나는 호스트 마르코와 대화를 나누었던 에어비엔비 채팅창을 열었다. 약속된 버튼을 누르자 삐-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렸고, 웬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곧이어 검은 철창 문이 덜컥 열렸다.

"웰컴, 웰컴!" 방금 열린 대문 뒤에 놓인 또 다른 문을 열고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이 걸어 나오셨다. '사이트에서 확인한 마르코는 분명 우리 또래 같았는데, 관리인이신가?' 하는 것도 잠시, 환한 얼굴에 환한 얼굴로 "본죠르노(Buon Giorno)"하며 인사했다. 할아버지께선 "내가 마르코 아비야. 숙소는 위층이란다!)" 하는 소개와 함께 숙소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엘리베이터 하나 없는 아파트의 계단은 심지어 원형 계단 앞에서, 남편은 캐리어 두 개를 손수 들어 옮기며 새신랑 티를 팍팍 냈다. 할아버지 뒤를 바짝 딸아간 나는 다짜고짜 열쇠로 문을 여는 방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마르코를 만나기도 전에 마르코의 아버지 먼저 인사를 드리다니, 밖에서 식사 한 번 못해본 사인데 곧바로 집들이에 초대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멀리서 온 우리를 반기는 게 친절한 할아버지란 점이 오히려 더 기분 좋은 여행의 시작을 만들어 주었다(유럽에서 만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의 기억은 언제나 좋다! 옳다!). 벽면 곳곳을 무드등과 그림으로 장식한 아파트먼트는 엔틱 하면서도 있을 거 다 있는(무려 에어컨이 있다!) 알짜배기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 속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풍경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나 숙소 잘 고른 거 같아.'

프랑스어 악센트가 살짝 묻어 나오는 할아버지는 한국인이라는 우리들의 소개에 아는 체를 조금 하시더니, 텔레비전 옆에 마련된 명함 케이스와 종이 한 장을 들고 식탁 위로 나와 남편을 부르셨다. 종이 위에 숙소가 위치한 Urbana 길을 그려주시고는 "콜로세움이 이쪽이고, 테르미니 역이 이쪽 방면이면 말이야, " 하고 로마 초입자를 위한 나침반 설명을 해주셨다. 뒤이어 지도 위 네모를 하나씩 그려 넣으시면서 그림에 해당하는 가게의 명함을 테이블에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여긴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잘해, 이 집은 조금 비싸지만 이탈리아 음식 대부분을 꽤 괜찮은 퀄리티로 즐길 수 있지, 여기 피자도 괜찮아. 사이즈가 아담해서 간식으로도 좋아. 여기 코너에 젤라토 가게도 강력 추천하고..." 그중에는 숙소를 찾아올 때 눈에 담아두었던 젤라토 가게도 있었다. 현지인의 친절한 맛집 소개는 그 이후에도 몇 분 동안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어딜 가나 음식이 평타 이상이라는 점이지만, 기왕 먹는 거 누군가의 추천이 있는 곳에서 먹으면 좋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그날 처음 본 할아버지였지만 꼭 안아드리고 싶었다.

'그라찌에(Grazie; 감사합니다)'만 수 십 번 되뇌고, 유사시 비상 연락을 위해 할아버지의 전화번호까지 받아둔 후에야 숙소에 단 둘이 남을 수 있었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지만, 창밖 로마는 아직도 한낮이란 점에 마법 같았다. 적당히 따뜻한 10월의 이탈리아라니, 날씨만으로도 완벽하다니, 역시나 시작이 좋았다. 계획했던 대로 체크인까지 착착 진행된 오늘, 대 자로 뻗어 있는 캐리어의 바퀴들을 관찰했다. 이전보다 조금 더 헤어진 모양. 나는 괜히 캐리어 바퀴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고대 로마 전차를 견뎌냈던 돌들, 그 위를 너희가 걸어본 거야. 콘크리트 바닥만 다니던 때보단 닳아 없어졌겠지만, 그래도 운이 좋아, 그지?' 사물의 의인화를 시작하는 걸 보니, 한숨 돌린 게 더 확실해졌다.

"우리 아까 봤던 젤라토 가게 가볼까?" 캐리어 한 대와 백팩 한 대를 내려놓은 남자가 말했다.
"좋아!" 캐리어 한대와 백팩 한 대를 내려놓은 여자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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