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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분량은 세 쪽, 모닝페이지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읽고

by 프로이데 전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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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성령이 날 인도할 뿐이다(23쪽).
-윌리엄 블레이크-



그런 날이 있다.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생각들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이불을 덮고 눈을 감거나,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아침인사처럼 입에 달고 살며, ‘집중 맞은 도둑력’과 ‘도둑맞은 집중력’ 간의 차이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날 말이다. 크리스마스 조명이 거리에 들어서고 달력 한가운데 표시된 숫자가 12로 바뀌면 그런 날들이 더 자주 찾아온다. 맘이 급해진다. 어떡하면 좋지?


그럴 때마다 세상은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나를 다독이고, 고든 맥도널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 적었듯이 영혼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따로 가져 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예술가 줄리아 카메론은 저서 <아티스트 웨이>에서 소개했듯이 모닝페이지(morning page)란 이름의 리추얼(ritual;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규칙적인 습관)을 가까이하길 권유한다. 모닝페이지? 그게 뭐지?




줄리아는 창조성을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모두의 내면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창작자가 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다 보니 창작의 통로가 막혀 버렸다. 창작자 대신 완벽주의자와 심술궂은 비판자(억압적인 잠재의식)를 모시고 사는 날이 많아졌고, 창조주와의 관계도 덩달아 소원해졌다.


창조성을 되살리고 더 나아가 창조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줄리아는 오롯이 나 자신과 내 안의 창작자를 관객으로 하는 기록과 대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때, 모닝페이지를 적어 보라고 말한다. 모닝페이지는 세 쪽 분량의 기록으로, 논리적일 필요도 없고, 완성도를 갖춘 글일 필요도 없는, 말하자면 무의식의 기록이다. 오로지 내 안의 창작자(그 약하고 약한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시간이다. 필담 같은 거다. 대나무숲을 향해 내지르고 싶었던 말들(a.k.a. 마음의 소리들)을 한 데 모아 종이 위에 토해내는 작업이다.


무엇이든 생각나는 것을 세 쪽에 걸쳐 쓰는 것은 모닝페이지의 대원칙이다. 쓸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쓸 만한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쓰면 된다(49쪽). 중요한 것은 아무 말대잔치가 되어도 좋으니 어떻게든 세 쪽을 채우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 원칙은 누군가에게 모닝페이지를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거다. 모닝페이지는 나와 내 안의 창작자 간의 은밀한 대화이지 자랑거리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모닝페이지 기록의 타이밍은 이름 따라 아침이어도 되지만, 쓰는 사람의 일정에 따라 한낮이 되어도 좋고 자기 직전이 되어도 괜찮다. 상관없다. 중요한 건 꾸준히 쓰는 것이다. 꾸준히, 세 쪽에 걸쳐서, 꾸밈없이 내면의 소리를 쓰면 된다. 왜 그래야만 하냐고?


모닝페이지를 쓰면서 우리는 완벽주의자와 심술궂은 비판자를 내면에서 몰아내고 창작자 어린아이와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훈련을 시작한다. 이와 관련하여 줄리아는 모닝페이지의 쓸모를 ‘다른 한쪽 면에 이르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49쪽). 이때 다른 한쪽 면이란 완벽주의자와 비판자가 억누르고 있던 창작자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 내가 품었던 생각, 내가 닮고 싶은 창조주의 모습, 그런 것들 말이다.


속는 셈 치고 한 번이라도 모닝페이지를 써 본 이는 두 번 놀란다.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문장들 중에 부정적 사고와 두려움의 흔적이 상당히 많아서 한 번 놀라고, 기록을 계속해 나가자 그 사고와 흔적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마음 한 구석이 어느덧 고요한 호수를 닮아 평온해짐을 느끼면서 또 한 번 놀란다. 기록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론이라면 실제 파트로 넘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경험담을 나누자면, 나는 약 1년 전부터 모닝페이지를 적어 오고 있다. 화가 친구의 권유로 <아티스트 웨이>를 사서 읽고 모닝페이지 쓰기 챌린지를 함께 한 게 시작이었다. 평소 일기를 꾸준히 쓰던 나였지만 자가 검열 없이 무의식만으로 세 쪽을 페이지를 가득 채우기란 쉽지 않았다.


이 문장 뒤에 저 문장이 오면 흐름이 어색하지 않나? 이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밉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솔직하게 적어도 될까? 맞춤법이 틀린 건 아닌가? 논리적이지 않은데 어떡하지? 글씨가 엉망인데 찢어버릴까? 쓸 게 없는데 도대체 뭘 쓰란 말이지? 기왕 적는 거 멋진 말, 착한 말을 적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온갖 걱정이 나를 방해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다그치지 말자고 기도했다. 나를 보듬어주고 되찾고 싶어서 시작한 모닝페이지인데, 이 마저도 억압하고 검열한다면 스스로를 낭떠러지로 몰아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 모닝페이지의 진입 장벽을 낮춰보기로 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크기의 노트, 기왕이면 디자인이 맘에 쏙 드는 노트를 골라 내 눈에 가장 잘 뜨이는 곳에 두었다. 함께 모닝페이지 쓰기 챌린지를 할 친구들을 모집했고 네이버 밴드를 결성했다. 모닝페이지의 내용을 공유하진 않지만 서로 모닝페이지 작성 여부를 체크했고 격려해 주었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니 작심삼일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성과가 눈에 보이게끔 밴드 내 ‘미션 인증하기’ 기능도 적극 활용하였다. 모닝페이지를 쓴 날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쾅 찍어 주자, 리추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날과 그렇지 못한 날이 달력 위에 뚜렷하게 표시가 되었다. 그러자 도장이 비어 있는 날을 줄이고 싶다는 욕심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모닝페이지를 쓰는 시간이 쌓일수록 미타임(me time; 나와 독대하는 시간)이 솔직해졌다. 데스노트로 시작했던 기록이 감사의 기록으로 바뀌는 날도 많아졌고,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기도제목들이 우르르르 쏟아져 나와 노트를 가득 메우는 날도 잦았다. 나로 시작한 문장이 이웃과 창조주를 향한 질문으로 확장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정말 짜릿했다. 90일 차가 지날 무렵엔 더 이상 노트 크기가 중요하지 않아 졌다. 빽빽한 줄간격을 자랑하는 몰스킨으로도 세 쪽 채우기가 수월해졌다. 그리고 2023년 12월 17일 자 기준, 373일 차 모닝페이지를 적었다.


창조주는 위대한 아티스트다. 아티스트는 다른 아티스트를 좋아한다. 우주가 당신의 꿈을 지지할 거라고 기대해 보자. 우주는 반드시 그럴 것이다(212쪽).
-줄리아 카메론-




모닝페이지는 영혼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한다. 나의 생을 함께하고 나의 생을 안내하는 자의 말을 경청하도록 돕는다. 굳은 뇌를 말랑하게 하는 스트레칭이자 놀이로, 둘도 없는 친구(바로 나!)와의 산책을 즐기게 해 준다. 혹자는 모닝페이지 쓰기가 자기 자신만의 방에 갇혀 나오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가 경험한 모닝페이지 쓰기가 담아낸 마음의 소리는 놀라운 스케일을 자랑한다. 나로 시작한 문장들 안에는 너, 우리, 너희 또는 그들이라 구분 짓는 사람들, 이웃이라고 퉁 쳐서 부를 수 있는 사람들, 그 모두를 담아내는 사회와 세상 그리고 창조주가 함께하고 있다.


미타임을 갖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허튼소리! 모닝페이지를 리추얼 삼는 것엔 늦고 빠르고 가 없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 결심을 세우는 지금이 어쩌면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가까이에 있는 작고 이쁜 노트를 집어 들고, Day 1이라는 넘버링과 함께 바로 시작해 보라. 복잡한 머릿속, 좀처럼 가져보지 못했던 나와의 대담,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들, 뭣하면 눈앞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도 좋다. 뭐든 적어보라. 당신 내면의 창작자 어린아이가 당신을 마중 나올 거다(아이가 울고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을 너무나 오랜만에 본 나머지 감격스러워서!).




*<아티스트 웨이>는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이란 부제가 딸린 구 버전(2017년 출간)과 동일한 내용을 6주 분량으로 개편해서 정리해 놓은 신 버전(2022년 출간)으로 나뉜다. 필자는 구 버전을 읽으며 모닝페이지를 리추얼 삼았다(사실 어느 버전을 읽든지 상관은 없다). 본 기사에서 인용한 문구와 괄호 처리한 쪽수는 구 버전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정기적으로 매거진 리더십 코리아에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편집장님의 허락 하에 해당 글의 전문을 브런치에도 옮겨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래 글은 매거진 리더십 코리아의 2023년 12월호에 실린 기사로 원문 링크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klschool.co.kr/mag1.php?mode=view&bid=2659&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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