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글집 3: 들어가는 글
며칠 전의 일이다. 아빠는 술을 한 잔 걸치고 집에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었다. "많이 마셨어?" 나는 팔짱을 끼고서 바늘눈을 했고, 남편은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아빠를 반겼다. "얘들아 여기 좀 앉아봐라." 아빠는 침대를 소파 삼아 걸터앉으면서 우리를 서재로 불렀다. 취중진담의 시작이었다. 나는 아빠 옆에, 그러니까 침대 위에 앉았고, 남편은 아빠 앞에,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러니까 아빠가 나보다도 남편과 눈을 진득하게 맞추며 이야기를 한 건 남편이 현관에서부터 아빠를 부드럽게 맞이한 것 때문만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앉은자리가 그래서였던 것도 있는 거다. 뭐, 아빠가 남편을 무척 이뻐하긴 하지만(외동딸 인생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기 일쑤인 취중진담을 경계하는 나는 거의 침대와 맞닿은 벽면과 붙어 있다시피 하면서 두 남자를 지켜봤다. 아빠의 등과 남편의 얼굴이 동시에 보이는 구도. 나는 두 사람을 주연으로 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처럼 관람자 모드로 삼자대면에 임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게 주어진 무형의 유산을 확인했다. 오롯이 내가 만들어 온 거라 생각했던 나의 말투가 알고 보니 아빠의 말투와 꼭 닮았던 것이다. 문장의 맛을 살려주는 억양과 문장에 담긴 뉘앙스 모두 대체로 닮아 있었다.
... 친구들이 나를 너무 좋아해서...
... 떼잉, 맘에 안 들어...
...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지...
... 내가 가만히 보니까...
중립적인 듯 들리고, 관찰자 입장에서 말한 듯 하지만, 확고한 입장이 숨어 있는 말투였다. 가족이니까 말투가 닮을 수 있다고? 그래,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나는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나의 말투, 나의 언어만큼은 내가 만지고 쌓아가며 가꾼 거라고. 그런데 삼자대면의 밤에 가족력을 새삼 실감했다. 그래서였을까, 아빠의 취중진담 내내 남편의 표정이 참 부드러웠다. 그는 평소 나를 대하던 표정으로 아빠를 보고 있었다. 남편이 듣기에도 아빠 말이 꼭 내 말 같았을까?
얼마 후 저녁. 대구에 있는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돌려놓고 남편과 함께 엄마와 하루 일과를 나누는데, 어라, 삼자대면 때의 감흥이 다시 살아났다.
... 그렇지 않니?...
... 그냥 지나갈 순 없지...
... 꼭 그래야만 한다는 건 아니지만...
... (흥칫뿡)...
세상에, 내 말투에 엄마 지분도 있었다. 통화를 끝내고서 나는 놀라운 발견이라도 한 듯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며칠 전엔 아빠한테서, 방금은 엄마한테서 내 목소리를 들은 거 같다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내가 두 사람을 닮았다고. 남편은 별말 없이 씩 웃기만 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하는 표정이었다. 이래서 보고 들으면서 배우는 게 무섭다고 하는 걸까? 괜히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다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오롯이 내 힘으로 이뤄낸 게 있기는 할까?
내가 받은, 받을 유산엔 어떤 게 있을까?
찰스 디킨스가 썼듯이, 그 유산은 위대할까?
유산이란 말에 나는 가장 먼저 형태가 있는 물건들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좀처럼 물건을 버리지 않는 우리 가족 3인방(남편을 제외한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 주변엔 늘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제는 빈티지가 되어 버린 옷과 노트, 식기류, 라디오, 브로치, 책... 대체로 사연 있는 것들이었다. 기능만을 위한 물건은 우리 주변에 오래 남아 있지 못했다.
유산에 관한 생각은 점차 범위를 늘려 나갔다. 말투처럼 형태가 없는 유산, 이를테면 생활 습관이나 걸음걸이, 표정과 같은... 유형의 유산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보다도 더 애틋한 것들이 많았다.
내가 받은, 받을 유산들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의 답을 내놓고 있었다. 작은 것 하나도 나 혼자서 이룬 것이 없구나 하는 고백이었다. 겸허해졌다. 뜨거운 땀방울 하나가 몸 가운데를 훑고 지나가는 기분도 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내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졌고 완성되었구나. 그 환경의 중심엔 가족이 있었구나. 그렇다면 나중에, 나 홀로 남아 엄마 아빠와의 시간을 그리워하는 날이 오면, 그때 들춰볼 만한 게 낡은 사진첩만 있진 않겠구나. 어쩌면 나를 비춘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을 떠올릴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자 조금 슬퍼졌다. 동시에 조금 더 행복해졌다. 나는 많은 걸 받고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서.
그 많고 많은 유산 중에서 유형의 유산만을 골라 이 책에 담았다. 눈에 보이는 걸 먼저 글로 정리해 보면 그렇지 않은 걸 다루기가 좀 더 쉽지 않을까 하여.
브런치를 통해 이 책의 목차를 하나씩 완성해 나가는 동안, 나도 여러분들도 계속해서 질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나를 나되게 만든 사람은 누구였는지를. 왜냐면 적어도 나는, 그 질문을 하는 동안 내가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 틈글집은 내가 만든 말이다.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 스쳐 지나가고 마는 생각이 날아가기 전에 종이 위로 가져와 기록해 놓자는 의미를 담은 나의 독립출판물 시리즈명이다.
브런치에는 따로 소개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두 권의 틈글집을 냈다. ISBN이 없는 책이지만 (감사하게도) 국립중앙도서관에도 2부씩 보관되어 있다. 틈글집을 소개하는 자리는 별도의 발행글로 마련하려 한다.
다만, 이번 연재 브런치북에 세 번째 틈글집의 콘텐츠를 미리 공개하는 만큼, 2025년 가을,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 '지음지기' 부스에서 첫 공개할 틈글집3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