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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옆, 치지직

SONY 라디오

by 프로이데 전주현

나는 줄곧 자기소개란에 "라디오와 함께 하는 일상을 반긴다"라 적어왔다. '이 시대에 라디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꺼이 (즐겁게) 반박한다.


"그럼요, 라디오는 아직 건재해요. 손을 들어 잡아 탄 택시 기사님께 여쭤보세요. 라디오만한 친구가 없다고 하실 걸요? 스마트폰에 라디오 어플을 받아 생방송을 들어보세요. 실시간 채팅창이 얼마나 활발한지 놀랄걸요? 유명 유튜버의 실시간 채팅창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렇다고 라디오가 이 시대의 넘버 원 매체라 주장할 마음은 없다. 단지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인다(video kills the radio star)는 노래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비꼬면서, (결국엔) 내 이야길 하고 싶을 뿐이다.


내게 라디오와 함께 하는 일상은 아빠의 삶을 달리 표현한 거나 다름없다. 줄곧 자기소개란에 아빠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러브레터를 썼던 거다(아빠, 이거 읽고 있어?). 그도 그럴 것이, 식사, TV 시청, 독서, 약속 시간을 제외한 아빠의 시간은 치지직대는 라디오 수신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할 때, 잠을 청할 때, 외국어 공부를 할 때,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 설거지를 할 때... 아빠는 어김없이 라디오를 튼다. 정해진 패턴은 없지만, 그럼에도 정리를 시도해 볼 순 있다. 바로 이렇게: 새벽엔 주로 EBS 방송을 들으며 외국어(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공부하고, 차 안에선 AFKN이나 클래식 음악 채널을 틀고, 자기 전에는 주로 디제이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나오는 곳을 랜덤으로 설정하는 편이다. 이러니 아빠와 함께한다는 건 아빠가 듣는 소리(라디오)를 함께 듣는 것과 같았다.



라디오는 아빠와 내 주변의 공기를 말소리와 음악으로 채우며 종종 마법을 부린다. 라디오가 틀어진 공간의 공기를 함께 들이마시고 내 쉬다 보면 마주 보고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마음까지도 자연스레 꺼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평소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아빠가 모른다고 하면 나는 그 노래를 왜 맘에 들어하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게 된다.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얘기하게 된다.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어디서 인데, 이런 가사가 자신을 쿡 찔렀다면서. 그러면 아빠도 자신이 들은 노래 중에 비슷한 걸 언급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아빠가 아빠로 불리기 이전의 삶이 있었지 참,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게 된다. 뜨는 것이 아니라 뜨게 된다.


그런 아빠가 내게 거의 물려주다시피 한 라디오 기계가 하나 있다(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내가 그 라디오를 유물 삼기로 맘대로 정했기 때문이다). SONY에서 만든 제품인데 무려 110V 변압기가 있어야 작동하는 빈티지 기기다. 정사각형 외형이 꽤 귀여운 인상을 풍긴다. 라디오의 앞면엔 다이얼을 돌릴 때마다 곧바로 주파수를 확인할 수 있는 FM/AM 스팩트럼이 줄자처럼 단정히 놓여 있고, 그 위는 디지털시계가 번쩍이며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이 라디오를 내가 쓰기 시작한 건 스무 살, 대구에서 상경해 아빠의 오랜 서울 살림살이를 공유하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나는 아빠가 그래왔던 것처럼 침대 머리맡에 라디오를 두고 썼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라디오와 함께 했다. 알람 시계와 취침 기능이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알람 기능을 켜 두면 기상 시간에 맞춰 라디오 채널과 함께 기상 알람음이 함께 울렸다. 아침잠이 많은 나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아침 방송은 청취자의 에너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의외로 신나고 밝은 노래를 많이 틀어준다). 또 밤에는 취침 기능 버튼을 누르고 라디오를 재생했는데, 그러면 침대에 눕고 1시간 뒤에 라디오가 자동으로 꺼지곤 했다. 심야 라디오 디제이의 달콤한 목소리가 안경 벗은 얼굴 위를 지나 폭신한 침대 주변을 꽉 채우면 잠이 솔솔 왔다.


하지만 라디오 친화적인 나도 가끔 아빠의 라디오 사랑이 과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주변을 항상 소리로 가득 채우면 생각할 여백, 숨 쉴 여백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집중력이 필요한 상황이거나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였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이를테면 중국어 강의)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도 마찬가지였고. 그럴 때마다 아빠는 어떻게 매일 이 소리를 견디는 걸까 궁금해졌다(아니, 애초에 질문이 잘못된 걸 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소리를 견디질 않고 그저 듣는 입장일 테니까). 대신 아빠가 라디오를 계속 듣는 게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 이지 않을까 하는 어림짐작을 해본 적은 있다. 벨기에에서 일 년간 공부를 하던 때였다.


당시 나는 작지만 알찬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개인 화장실과 침실 겸 공부 공간이 있던 곳이었다(아쉽게도 부엌은 공용 공간이었지만 그땐 할 줄 아는 요리가 별로 없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타지에서 공부를 하는 생활은 생각보다 덜 낭만적이고 더 힘든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익숙한 문화가 가득한 한국이 끊임없이 그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기숙사 침대 머리맡을 살피다가 한국이었더라면 SONY 라디오가 있었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힘이 날까 하여 스마트폰에 어플을 깔고 블루투스 스피커 전원을 켰다. 그러자 심야 시간대의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이 한낮의 벨기에에서 재생되었다. 시간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벨기에산 공기를 마시고 있었는데, 라디오 소리가 가득 들어찬 기숙사 방의 공기는 어느새 한국산이 되어 있었다. 한국어 문장, 노래, 광고, 추임새... 라디오의 모든 요소가 한국을 떠올리게 했다. 소리의 힘을 만끽했다. 외로움을 물리칠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 혹시 아빠도?



내가 아는 아빠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아빠의 라디오 사랑이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은 아닐 거다. 눈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것도 있을 테고, 걷거나 움직면서도 즐기기 쉬운 것도 한몫했을 거고, 라디오가 신속히 나르는 정보도 유용하다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어쩌면, 벨기에에서 내가 그랬듯이, 아빠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라디오 전원을 켰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재미있게도 위 문단은 조금만 바꿔 적어도 말이 된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의 라디오 사랑이 단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만은 아닐 거다. 눈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것도 있을 테고, 걷거나 움직면서도 즐기기 쉬운 것도 한몫했을 거고, 라디오가 신속히 나르는 정보도 유용하다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어쩌면, 벨기에에서 그랬듯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째서? SONY 라디오는 그 자체로도 내가 아빠에게서 받은 유형의 유산이다. 하지만 그 기기에 담긴 무형의 유산이야말로 내가 아빠로부터 물려받고 오래 고집할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밤에도 아빠와 내 침대 머리맡에는 치지직 하는 라디오 소리가 울려 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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