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탈리스트(The Brutailist)를 통한 "인간성"의 탐색
*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줄거리 및 주요 장면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영화 <브루탈리스트>(The Brutialist, 감독 및 각본 Brady Corbet)를 보고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남겨보려고 합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나치에 쫓겨 미국으로 이주한 헝가리 유대인 건축가인 '라즐로 토스'의 이주와 생존, 그리고 예술적 욕망과 투쟁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가 역사적인 느낌이 강해서 실존인물을 영화화했나? 하는 착각을 하게 하지만 허구의 전기 영화예요. 이 영화의 제목이 <브루탈리스트>인 이유는, 주인공 라즐로가 추구하는 건축양식이자, 그 양식이 지닌 철학적 특징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깊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통해 제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부터 여러분과 나눠보려 합니다.
이 영화를 잘 이해하려면, 브루탈리즘(Brutalism)이라는 건축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단순한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특징으로 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안도다다오가 브루탈리즘을 구현하는 건축가입니다.
브루탈리즘의 핵심은 기능주의입니다. 이 양식이 유행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들을 빠르게 재건하기 위해 낮은 비용, 고효율, 기능 중심의 건축이 절실히 요구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브루탈리즘은 단순히 기능만을 추구한 건축은 아니었습니다. 이 양식은 모더니즘의 연장선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평등과 공공성이라는 이념적 가치를 담아내려는 시도를 함께 품고 있었죠. 권력의 과시로 여겨지는 장식적 요소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대신 재료 그 자체와 구조 그 자체를 통해 미학을 만들어내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꾸미지 않고 건축 자체로 말하겠다" 이것이 브루탈리즘의 근본적인 철학이죠.
실제로 브루탈리즘 건축물을 직접 경험해 보면 공간 전체가 시각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장식은 없지만, 건물 내부의 높이, 벽, 틈, 통로 등이 건축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만으로 시각을 제한하고 감각을 집중시키며 공간을 낯설게 만들어요. 뭐랄까, 시각적으로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느낌입니다.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탬버린즈 매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제주도의 본태미술관, 유민미술관 등이 브루탈리즘 건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브루탈리즘 건축물은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이 질서 정연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사람들에게 평온함과 안정감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형태는 무거운 침묵과 위압감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영화 속에서 라즐로가 설계한 건물은 웅장하고 신비롭게 보이는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과 압도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주려고 했던 메시지가 바로 이런 이중적인 감각에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영화를 해석해 보고자 합니다.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원합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매슬로(Maslow)의 욕구 계층 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살고자 하는’ 생존의 욕구를 가지며, 이후에는 안전, 애정과 소속, 존중, 자아실현 같은 욕구를 단계적으로 충족하고자 합니다. 즉 가장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채워지면 안정감이 들고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충족하고 싶은 동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의 본질은 결국 “채우고자 하는 힘”, 즉 결핍을 메우기 위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이 욕망을 발현하죠. 그렇지만, 끊임없이 발현되는 욕구를 모두 채우면 우린 평온하고 안정적인 상태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영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브루탈리스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 존재를 확인받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주인공 라즐로는 새로운 땅에 도착한 이주자로서, 자신의 존재가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예술가로서도 인정받길 원하죠. 대부호 반 뷰런은 예술가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의 권위와 통제력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죠. 반 뷰런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했고, 라즐로의 아내는 남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죠.
흥미로운 점은, 영화 전반부에서는 주인공들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서로를 탐색하듯 감정을 숨긴 채 움직이지만, 그 얇은 감정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반 뷰런이 라즐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때입니다. 초기 장면에서 반 뷰런은 자신이 원치 않던 서재 리모델링 현장을 보고 분노하며, 라즐로를 향해 자신의 난폭한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서재가 미디어의 찬사를 받게 되자 그는 다시 라즐로를 찾아와 젠틀하고 친밀한 태도로 변합니다. 라즐로 역시 처음에는 반 뷰런을 경계하고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의 집에서 단둘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의 태도가 조금씩 바뀝니다. 반 뷰런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라즐로가 필요했고, 라즐로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반 뷰런이 필요했던 거죠. 서로의 '니즈'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 그들의 표정은 묘하게 미소 짓습니다. 전 두 사람의 표정이 마치 감추는 듯했지만 감추지 않았던 그들의 욕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욕망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언제나 위로 향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아래로 끌어내린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욕망을 통해 결핍을 메우고, 더 나은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좌절될 때, 오히려 우리는 분노, 집착, 자기 파괴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리곤 하죠.
불교 철학에서는 이처럼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근본적인 세 가지 마음을 "탐(貪), 진(瞋), 치(癡)"라고 부릅니다. ‘탐’은 탐욕(貪慾)을 뜻하며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진’은 진에(瞋恚)를 의미하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의미합니다. 진에는 살아있는 목숨에 대해 미워하고 성내는 것을 의미하므로 단순한 분노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포함되죠. 그리고 ‘치’는 우치(愚癡)를 의미하며, 그 욕망과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르는 무지를 뜻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 마음이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즉, 삼독이 중생의 고통을 만드는 원인이고 삼독을 제거하면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인간은 욕망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지만, 그 집착은 다시 고통을 낳고, 더 갈구하고, 더 미워하고, 더 무지해지는 순환 속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욕망은 나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방향성은 위를 향합니다. 존재감을 드러낸다거나,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끌어가겠다는 생각과 행동이 욕망의 표출이므로 '위로 향하는 방향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욕망은 본질적으로 비어있고,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집착하게 되며 그 집착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잃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즉,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하죠.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건물은 점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영화 속 인물들은 점차 자신의 욕망과, 욕망이 좌절되는 순간순간을 날것 그대로 드러냅니다. (영화 후반부의 내용 상당 부분이 여기 해당되는 것 같아 내용을 직접 쓰지는 못하겠네요) 결국 그 욕망은 중독과 자멸로 이어집니다. <브루탈리스트에>에서 본래 건축물의 용도는 지역 주민들이 모여 예배도 드리고, 이야기도 나누며, 함께 운동도 하고 책도 볼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따듯한 공동체의 공간이었죠.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건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감옥 같아 보였습니다. 극단적으로 제어된 채광, 무겁게 느껴지는 벽과 밖으로 연결되지 않은 구멍, 무릎까지 물이 차는 지하 등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느낌이라기보다는 위압감이나 압도감, 무력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삼독의 굴레를 건축물의 형태로 시각화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요.
인간이 인간이기에 갖는 특성, 우리는 그것을 "인간성"이라 부릅니다.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는 인류 문명의 시작을 “부러졌다가 나은 대퇴골”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의 상처를 돌보는 행위, 그리고 그 상처가 회복되도록 곁에 머무는 태도, 바로 거기에서 인간다움이 시작된다고 본 것이죠.〈브루탈리스트〉속 라즐로의 아내는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 선택은 어쩌면 자신의 욕망의 반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는 집착하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욕망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점점 파괴해 가는 남편에게, 함께 이스라엘에 가자며 조용히 다른 가능성을 제안하죠.
불교에서는 삼독(탐·진·치)을 끊으면 해탈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없는, 욕망하며 흔들리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욕망을 억누르거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일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