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동물은 태어날 때 상태에 따라 미성숙형 동물(Altrical species)과 조숙형 동물(Precocial species)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생물이건 태어나면 포식자로부터 일정기간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조숙형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어느 정도 독립적 행동이 가능하다. 기린, 말, 코끼리 같은 동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눈도 못 뜨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개, 고양이, 조류, 그리고 인간 등이 미성숙형 동물에 해당한다.
미성숙형 동물 중, 인간은 고도의 두뇌 발달과 직립보행이라는 진화적 특성 때문에 출생 시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숙하게 태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많은 돌봄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인간은 나약하게 태어나 타인과의 관계 형성의 여하로 생존이 결정되는 존재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두뇌발달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두뇌의 발달은 (1) 신경세포 연결 후 시냅스 형성, (2) 시냅스들이 모여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신경회로 구축, (3) 수초 형성, (4) 필요 없는 시냅스와 신경회로 소멸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중, 신경세포를 연결하고 시냅스를 형성하는 첫 번째 과정이 가장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때는 보편적으로 3세(유아기)까지이고, 그 이후부터는 새로운 시냅스를 만드는 속도나 양이 현저하게 감소한다고 한다. 또한 기초적 기능을 담당하는 회로 발달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그것을 바탕으로 발달하는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는 회로가 잘 발달한다고 하니, 정보를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시냅스의 형성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아기가 두뇌 발달에 결정적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 봐야 할 점은, 보편적으로 보호자 없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시기는 3세까지라는 점이다. 태어나 개인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점에, 수동적인 돌봄의 경험이 두뇌 발달을 결정짓는 그릇을 만든다니. 어쩌면, 이러한 생리적 현상은 인간 개인이 스스로 놓인 환경에 얼마나 의존적이며, 생물학적으로 나약한 존재인지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문득, '우린 과연 온전하게 '나'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우린 이토록 의존적인 존재인데, '나 다움'이라는 게 절대적일 수 있을까? 과연 나의 생각과 판단들이 '나'를 설명하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프랑스 철학자 낭시가 언급한 것처럼, 인간 존재의 특질이 "자기 -밖"에서 생성되는 것이라면, 왜 우린 그토록 '나'를 찾고 싶어 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며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것도, 관계에 집착하는 것도, 그래서 그 관계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것도 결국 생리적인,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가 '나'다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는 건,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관계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은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은 이토록 나약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던 미성숙한 생명체 시절의 공포를 내재한 채, 숙명처럼 주어진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지도 모르겠다.
난 온전하게 '나'로 존재하길 그저 '희망' 하며 그렇게 당신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Altricial vs. Precocial: 7 Key Differentiators - A-Z Animals. (2023). https://a-z-animals.com/blog/altricial-vs-precocial-key-differentia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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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소연. (2014). 두뇌발달 연구에 기초한 유아교육교사의 방향, 유아교육연구, 34(4), 327-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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