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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ny Oct 30. 2020

소비 경험은 자산이다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거짓말 안 치고 옷 딱 두 벌만 가지고 1년을 살았던 적이 있었다. 재수하겠다고 서울에 있는 학원으로 상경을 앞두던 차였다. 아무와도 친해지지 않고 공부만 하겠다고 다짐했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애초부터 아무도 말 못 걸게 하자!’라는 요상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딱 옷 두 벌만 챙겼는데 하나는 시뻘건 아디다스 파이어버드 세트였고 다른 하나는 부산 시장 바닥에서 산 병아리색 후드티와 보라색 츄리닝 바지(이것도 심지어 세트)였다. 옷을 병신같이 입으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지 않겠냐는 진지한 고뇌 끝에 내린 결론은 개뿔 친구들 잘만 사귀고 놀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경험이 오히려 옷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옷 두 벌로 1년을 사는데 어떻게 안 쪽팔렸겠나. 그 와중에 유난히 옷을 잘 입고 다니던 옆 반 애 한 명이 있었다. ‘ㅉㅉ 저렇게 옷에 신경 쓰면 언제 공부하나?’ 혀를 차면서도 그 애를 보며 공책 맨 뒷장에 나라면 어떻게 스타일링했을지를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주말 아침이면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는 오전 내내 패션 잡지 코너에 틀어박혀 살았다. 재수가 끝나고는 두 달간 바싹 알바해 모은 돈 전부를 옷 사는 데 써버렸다. 술집에서 새벽 다섯 시까지 서빙 일을 했으니 돈을 꽤 모았는데 그걸 다 탕진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옷 사는 데 미친 듯이 돈을 썼다. 국가장학금으로 받은 돈도 있었으니 꽤 큰돈이었던 기억이 난다.

1년 전부터 투자를 조금씩 하면서 그때 산 옷들이 생각났다. 대부분은 버렸고 남은 것들마저 작아서 못 입는 게 태반이었다. 거기에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현타가 왔다. 지금쯤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생각을 접었다. 수십 벌의 옷은 온데간데없지만 소비 경험은 자산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듣는 말 중 하나가 ‘너는 너처럼 입는다’다. 옷은 사라졌지만 스타일은 남았다. 심지어 경험까지. 옷을 미친 듯이 사서 입어도 보고 수없이 많은 패션 잡지도 읽어보던 그때의 경험 덕분에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기준이 뚜렷해졌다. 어떤 옷이 좋은 옷인지, 소재마다 어떤 특성이 있는지도 공부했다. 그때의 경험이 패션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패션 일러스트를 배워보자는 일념으로 군대에서 난생처음 그림도 배우게 했다. 패션디자인 스쿨 입시도 지원해 실기 시험을 통과하는 성취까지 안겨줬다. 츄리닝 두 벌이 만든 작은 열등감에 돈과 시간을 얹었더니 만들어진 자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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