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주어진 짧은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의 주제는 Memorial Design으로 일종의 추모공간, 기억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했던 설계 프로젝트와는 다른 점들이 좀 있었다. 우선 메모리얼이 들어설 땅이 가상의 대지로 주어졌다. 그리고 학생들은 이 대지를 활용하고 변형시켜서 야외공간으로 이루어진 추모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이런 규칙들은 건물이 아닌 외부공간을 다루는 데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추모의 대상을 선정하는 것도 학생들의 자유였다. 추모라는 말로 표현을 하다 보니 공간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지만, 프로젝트에서 요구하는 공간은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대해 기억하고 기념하는 공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설명하기에 추모공간이라는 말보단 메모리얼이라는 말이 더 적합했고, 그만큼 주제 선정과 디자인에 있어서 자유도가 높고 다소 추상적인 성향이 있는 프로젝트였다. 평소 하던 설계과제들과 달리 구조나 재료 등의 현실적인 부분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점도 특이했다.
주제 선정
나는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선정했다. 이때 한국현대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과제가 주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주제였다. 다른 주제들도 떠올렸었지만, 4.3 사건이 그중에서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가장 와닿는 주제였고, 스스로도 이 역사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제로 정했다.
주어진 대지
이번 프로젝트에서 주어진 대지는 가상의 대지로 가로가 150m 정도 되고 5m 정도의 고저차가 있었다. 가상의 땅이기 때문에 방위를 설정하는 것은 자유였고, 이 대지가 있는 지역도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 주어진 대지의 일부를 강이나 호수가 지나간다고 설정할 수도 있었고, 바닷가로 설정할 수도 있었다. 교수님은 우리가 이 대지를 절토, 성토하며 지형을 변형하고 활용해 공간을 만들도록 유도했다. 한마디로 이번 과제는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닌 랜드스케이프를 만드는 것이었다.
참고장소: 섯알오름 학살터
4.3 사건을 주제로 선정하고 나는 주어진 대지와 비슷한 공간이 제주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구체적인 장소가 있다면 이 장소를 디자인하는 데에 참고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은 장소가 섯알오름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제주도 남쪽에 위치한 낮은 오름인데, 오름 가운데에 있는 구덩이가 과거에 학살에 사용된 비극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은 전에 제주도에 갔었을 때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는데, 제주의 흔한 아름다운 풍경과 학살현장이 강하게 대비되는 장소였다.
섯알오름 학살터
바깥에선 오름에 가려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만 이 현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은 4.3이라는 사건이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묻혀 있던 역사를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재하는 이 공간을 떠올리면서 작업을 하다보니 설계에 몰입하는데에 도움이 됐다.
케이스 스터디
이번 과제를 하면서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건물과 메모리얼들을 많이 참고했었다. 리베스킨트는 특유의 해체주의적인 표현방식을 이용해 유대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인상적이다.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라는 점에서 4.3과 홀로코스트가 닮아있는 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스타일을 이번 메모리얼 프로젝트에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jewish museum berlin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잠시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을 살펴보자. 이 건물은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겪었던 아픔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이 특별한 점은 단순히 외형에서만 이런 이야기를 담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 공간들도 이런 컨셉을 잘 담고 있고, 평면을 보더라도 건물의 강렬한 컨셉이 전해진다.
평면 archimaps.tumblr
쓰촨성 지진 추모관
쓰촨성 지진 추모관은 핀터레스트를 통해 찾게 된 이미지였는데, 건물이 아닌 랜드스케이프로 추모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이번 과제에 적용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대인 박물관에서 마치 폭력에 의해 찢어진 듯한 형상을 쓰촨성 지진 추모관처럼 대지에도 적용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arquitectura viva
디자인 과정
1. 분지 만들기
첫 번째로 한 일은 주어진 대지를 제주도의 섯알오름과 같은 분지형태로 만드는 일이었다. 분지의 형태를 만든 것은 분지가 내부에 특별한 공간을 담고 있기에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내부가 감춰져 있는 것이 4.3의 특성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대지의 낮은 부분의 땅을 파고, 한쪽 부분에 성토를 하면 분지의 지형을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분지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마치 땅 밑으로 들어간 것처럼 어둡고 무거운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가 외부에서 인식하지 못한 장소에 아픔이 묻혀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케치와 라이노를 이용한 모델링과정
2. 상처 만들기
나는 대지에 상처와 같은 모습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4.3 사건의 폭력적인 면들을 담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칼로 여러 방향에서 벤 듯한 대지를 만들고 그 방향을 따라 길을 만든다면 방문자들은 마치 대지에 남은 상처로 들어가는 느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사실 이렇게 대지에 깊은 골들을 만든 것은 대지를 더욱 자유롭게 변형하도록 한 교수님의 말씀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덕분에 이런 ‘상처’라는 컨셉을 더 강하게 대지에 적용할 수 있었다.
스케치와 모델링과정
피터 아이젠만의 City of Culture of Galicia 를 참고했던 안. 사진 archdaily
중간에는 피터 아이젠만의 City of Culture 처럼 큰 구조물들이 마치 지형이 수직으로 튀어나온 듯한 형태를 이용해 내부의 메모리얼을 만들려고도 했었다. City of Culture과는 반대로 메모리얼은 건물이 아니라 바닥에 움푹 파인 방식으로 만드려고 했다. 아마 이런 방식으로 할 수 도 있었겠지만,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케이스는 훨씬 큰 규모의 대지에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지를 두부 자르듯 자르는 것은 기존의 대지를 파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종적으로 선택한 안의 스케치와 모델링
설계진행과정을 보여주는 그림
위 그림은 메모리얼을 구상하면서 주어진 대지를 변형하는 과정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기존 대지에 있던 골짜기 부분을 분지로 만들고 절토와 성토를 통해 분지의 깊이감을 키웠다. 그리고 대지에 새겨진 상처이자 메모리얼의 좁고 깊은 통로가 될 골짜기들을 만들었다.
3. 공간 만들기
길
대지의 상처를 따라서 뻗어있는 길들이 이 메모리얼에서 중요한 공간이었고, 사람들이 이 길들을 걸어 다니면서 충분히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길 자체도 폭이나 경사를 다양하게 만들었고, 일부는 슬로프를 통해 지상 레벨보다 높게 올라가도록 했다.
트윈모션 프로그램을 이용한 렌더링 이미지
다만 문제가 이 길들은 천장은 열려있지만 땅속에 묻혀있는 길이기 때문에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 다닐만한 이유를 만들어줘야 했다. 처음에는 이 길들을 순환형으로 만들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중심성이 강한 이 메모리얼의 특성상 그다지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것보다는 각각의 길들이 막다른 길로 끝나더라도 그 길들의 끝에 포인트가 되는 공간들을 배치하기로 했다. 답답하고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만큼 그 끝에 특별한 공간이 있거나 서로 다른 풍경이 보인다면, 사람들은 그 공간들을 찾아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광장
메모리얼의 가운데에는 작은 광장을 만들어 답답한 길들을 걷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라와 쉴 수 있도록 했다. 상대적으로 트인 공간에서 메모리얼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고, 지나온 길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레드 콤플렉스
주제에 대해 교수님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나왔던 소재중 하나가 레드 콤플렉스였다. 레드 콤플렉스는 4.3 사건 자체와 그 이후의 4.3에 대한 인식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레드 콤플렉스에 대해서도 시각적으로 메모리얼에 표현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봤던 전시가 생각났다. 2018년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전시에서는 아주 강렬한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때 미술관의 거대한 벽면이 완전히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정말 많은 젊은 세대들이 이 벽에서 사진을 찍었었다. 이처럼 이번 메모리얼 프로젝트에도 호기심을 유발하는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메모리얼이 단순히 추모의 공간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알리는 장소로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임흥순
그래서 내 프로젝트에도 붉은색을 포인트 요소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마치 땅에 못이 박힌 듯 커다란 붉은 기둥을 설치하는 것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말뚝이 박혀있는 듯한 형태는 너무 자극적인 표현이어서 섬세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특별한 기둥이나 벽을 만드는 대신 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길 두 개를 붉은 선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 길들은 지하 레벨에 위치한 길들에서 봤을 때 길을 막고 있거나 대지를 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또 길중 하나는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 끝에서는 하늘이 뚫려있는 공간이 나오도록 했다.
메모리얼 방문자의 시선 스케치
디자인 결과물
평면
대지전체의 배치도
트윈모션 렌더링이미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환경에 메모리얼이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주변 대지는 나무와 풀이 자라는 녹지로 생각했다. 그리고 가상의 대지이므로 가장자리의 낮은 부분들은 바다와 연못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메모리얼 내부의 어두움과 통로 끝에서 보이는 풍경이 강하게 대비될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트윈모션 렌더링 이미지
대지에 정신없이 꽂혀있는 막대 같은 것들은 상처와 같은 이미지가 좀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추가한 것이다. 의도했던 것은 서툴게 꿰맨 상처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이 부분은 구조적으로 무리인 부분들도 있고 약간 과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상레벨과 지하레벨에서 바라본 평면
메모리얼의 중심 부분을 확대한 평면이다. 지하 레벨의 통로들에서 슬로프를 통해 지상 레벨의 광장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지하 레벨에서는 여러 개의 통로들이 서로 교차하도록 했다.
단면
메모리얼의 통로 부분을 잘라서 표현한 단면도이다. 깊고 어두운 통로이지만 다양한 경험을 주기 위해 각각의 길들은 방향과 폭이 다르고 경사도 다르게 설정했다.
모형
모형은 대지의 일부만 보여주는 식으로 만들었는데, 단면이 생기는 덕분에 위 사진처럼 통로 안에서의 시선을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컨셉이 강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렌더링보다는 심플한 모형이 전달력이 좋다고 느껴진다. 좀 더 지형이 잘 보이도록 대지 전체가 담기는 모형을 만들면 좋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