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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현 Jan 25. 2021

세운상가 답사기 1

1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나는 고등학생 때 처음 이곳을 가본 것 같다. 동아리에서 무언가 만들 재료를 사기 위해 청계천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상하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건물들이 서 있었다. 고속터미널 근처에 살았던 나는 이 건물이, 오래된 고속터미널 건물만큼 특이하면서도, 그만큼 낡았다는 걸 알았다. 건물 안에 들어가면 마치 전투함에 승선한 것처럼 통로가 복잡하고 어두웠다. 그래서 난 이곳을 돌아다니는 게 무서우면서도 재밌었다. 그때 이곳이 나에게는 좋은 탐험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바라본 이곳은, 알고 보니 도시재생 문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 핫토픽이었다. 이곳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어떻게 이곳을 바꾸느냐에 대한 논의는 무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고, 설계과제의 주제로 이곳을 사용하는 학교도 있었다.


나는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다. 군대에서 책이나 읽자라고 생각해서 가져갔던 책들 중 하나였는데, 세운상가가 지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잘 담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TV에서 변화된 세운상가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봤다. 그 낡아빠진 건물에 드디어 뭔가 변화가 생겼다니, 제대하고 언젠가 보러 가봐야 할 일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책의 내용을 참고해서 세운상가의 탄생부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세운상가에 대한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주로 2부에서 할 예정이다.




세운상가의 탄생


세운상가는 종묘 앞에 위치한 건물 하나의 이름이지만, 세운상가와 다른 건물들이 세트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건물들을 통칭해서 세운상가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편의를 위해 이 건물군을 통틀어 세운상가로 부르겠다.


종묘 앞의 세운상가로부터 시작하는 이 건물군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를 거쳐 지금의 충무로역의 진양상가에 이른다. 길이가 무려 1km에 달하는 땅에 건물들이 한꺼번에 생겨난 것이다.


완공당시의 항공사진 사진-서울시



시대적 배경

1967년 만들어진 세운상가의 이야기를 하려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때는 1943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점점 불리해져 가던 시기이다. 일본은 미군의 소이탄 폭격으로부터 대비해야 했다. 목조주택이 대다수인 당시에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빈 땅, 이른바'소개도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미래에 세운상가가 들어서는 이 1km에 달하는 부지는 일본의 법령에 따라 공터로 비워져 있었다.



광복 이후에는 이곳에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슬럼화 된 이곳은 결국 서울시의 골칫거리가 된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이곳의 판자촌은,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가난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이 1km 길이의 거대한 땅을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만약 지금이라면 이런 땅을 공원으로 만들거나 문화시설로 만들 수 있겠지만, 60년대 당시 한국에 그런 패러다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는 아직 전쟁이 끝난 지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로, 현재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가난하던 시기였다. 당시는 북한에 비해서도 산업과 경제력이 우세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만큼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광복이후 무허가 주택들이 차지한 부지. 사진-서울 역사아카이브


설계

세운상가의 설계는 당시 30대이던 김수근이 맡았다. 그의 세운상가 설계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유니테 다비타시옹, 그리고 하나는 보행데크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르 코르뷔지에를 들어봤을 것이다.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김수근은 새로 지을 건물을 코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과 같은 개념으로 구상한다. 이 건물이 세운상가가 추구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의 아파트와 주상복합의 개념을 제시한 최초의 건물 중 하나이다. 이 거대한 건물에는 상가나 학교, 체육관 같은 시설들이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의 기능을 한다. 마치 요즘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 단지를 벗어나지 않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따라 세운상가도 상가뿐만 아니라 동사무소, 파출소, 우체국과 같은 다양한 시설들을 품고 있도록 계획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처럼 옥상에는 정원과 초등학교까지도 계획했었다.


효율성을 중시한 코르뷔지에의 모더니즘 사상은, 성장과 개발에 목말랐던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 분위기에 완벽하게 잘 맞는 것이기도 했다. 1967년에만 해도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8층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런 당시에 10층이 넘는 건물들이 1km를 늘어선 모습은 사람들에게 꽤 충격이었을 것이다. 마치 요즘 우리가 DDP를 보고 최첨단의 건축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이 건물도 비슷한 느낌이지 않았을까 한다.



프랑스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사진- dezeen



보행데크

김수근의 설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보행데크였다. 1km에 달하는 이 기다란 건물군을 공중 보도가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지상의 보행로를 3층 높이로 옮겨서 공중의 거리가 조성될 수 있도록 한다는 아이디어로 계획된다. 지상에는 차도나 주차장으로 인해 보도를 넓게 못 만드니, 공중에 따로 보행데크를 만들자 하는 생각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보행자들이 오가는 데크를 따라 가게들을 위치시키면 활성화된 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김수근은 이런 계획에 맞춰 1층부터 4층까지를 상가로 계획했다. 보행자들이 접근하기 좋은 1층과 3층에 주 상업시설들을 두고, 2층과 4층에는 직접적인 접근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업시설들이 위치하도록 계획하였다.


세운상가의 보행데크 사진. 중간에 현재는 철거된 청계천 고가도로가 보인다 사진-경향신문



결과

결론부터 말해서 계획대로 된 것은 별로 없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지향했지만, 다양한 시설들이 들어오지 못해 건물은 결국 단순한 주상복합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1층부터 4층까지는 상가, 그 위는 아파트가 되었다.


그리고 건물군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1km에 이르는 보행데크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청계천로를 넘어 세운상가와 대림상가를 잇는 보행데크가 있었지만, 대림상가와 삼풍상가 사이는 보행데크가 한 줄로 바뀌고, 풍전호텔과 신성상가는 아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준공된 초기에는 쇼핑센터이자 아파트로 상당히 인기를 끌었으나, 1970년대 이후 이곳은 슬럼화 된다. 1967년 만들어진 이 건물들이 20년을 못 가서 쇠퇴한 것이다. 과거 이곳에서 불법 비디오나, 서적 등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게 된 것도 이곳이 그만큼 슬럼화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갔었던 2010년대를 생각해도 특별히 나아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상층은 보행데크로 인해 어두웠고,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오토바이들로 공기가 좋지 않았다. 보행데크로 만들어진 곳은 보행자가 없었다. 상점들이 물건을 쌓아두거나 에어컨 실외기를 두는 곳 정도였다. 보행데크 위에는 불법 촬영기기나 불법 녹음기기 등을 파는 걸로 보이는 곳들도 있어서 이곳은 뭔가 불법적인 일이 일어나는 어둠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2010년 지상층 사진- 서울시
2010년 3층 데크 사진- 서울시


비판

이 건물군에 대한 비판은 준공된 지 10년 정도가 될 쯤부터 등장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그 압도적인 규모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기 속에 묻혀있었던 비판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책에 등장하는 비판은 이렇게 4가지이다.


첫째는 추악하다, 볼썽사납다는 것이다.  

둘째는 녹지축의 단절에 관한 비난이었다.

셋째는 공중 보도로써 보차도 분리를 시도한 데 대한 비난이었다.

넷째는 뚜렷한 동서방향의 시가지 흐름의 중심부에 남북방향으로 세운상가가 들어서서 흐름의 선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난들의 포인트는 '부조화'라고 할 수 있겠다. 세운상가와 주변 건물들 사이의 부조화, 지역의 동선과 생기는 부조화이다. 세운상가라는 건물만 보던 과거와는 달리 도시적인 차원에서 이 건물을 평가하게 된 것이다.


아파트와 밀집된 주택들의 모습이 대조적인 우리나라의 흔한 풍경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건물 스케일 차이는 도시에서 부조화를 만드는 원인이다. 세운상가가 거대해 보이는 만큼, 주변 풍경과 동떨어져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조화롭지 않은 건물일지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면 얘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아파트단지와 밀집주거지의 대비. 사진-201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지역 동선과의 부조화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건물이라는 점에서 생긴다. 이 지역의 주된 동선 흐름은 동서방향이지 남북방향이 아니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생긴 지하철 1,2호선이 종로와 을지로를 따라 만들어진 것을 보면 확실히 동서방향으로 이동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으로 이어주는 공중 보도는 잘 이용되지 않았고, 큰 건물은 오히려 동선에 장애물이 된다고 보았다.



오늘날 세운상가의 모습 사진-서울시


슬럼화 문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이렇다.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이곳이 가장 거대한 쇼핑센터이자 아파트였겠지만, 이후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과 함께 더 나은 대안들이 많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굳이 이곳을 갈 이유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책으로 알아본 세운상가의 탄생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2010년대에 이곳을 거의 처음 갔었고, 이후로 꽤 많이 갔었다. 하지만 내가 본 건물은 2003년 쓰인 저 책에서 묘사한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70년대 말 슬럼화 된 이후로 30년이 넘게 이 슬럼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 중인 이곳을 다시 찾아갔다. 2부에서는 세운상가의 현재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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