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스한 다락 Jul 31. 2020

코로나19와 기독교인

내 주변에는 기독교인이 참 많은데, 얼마 전 그 중 한 명이 카톡으로 캠페인 하나를 보내왔다. 정부에서 교회 소모임과 식사 금지라는 제한을 내걸자 그건 종교 탄압이니 청와대 국민청원에 가서 항의하자는 내용이었다. 

     

평소 그 사람이 딱히 우파 시각을 보인 것도 아니어서 그 제안은 뜻밖이었는데 내가 더 놀랐던 건 하루 만에 27만 명이 넘게 그 청원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걸 종교 탄압이라고 받아들이다니?      




교회를 통해 계속 집단 발병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기독교인으로 얼마나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정부가 예배는 보장해주면서도 감염의 원인이 되는 소모임과 식사, 성가대 찬양만 콕 집어 삼가 달라고 했을 때 상당히 지혜로운 결정이라고 생각을 했다.     


‘교회에 사람 모이는 걸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화난 목소리도 심심찮게 나올 때였다. ‘교회가 신천지와 다를 게 뭐냐?’라는 비아냥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중립을 취해야 하는 세속 정부가 사회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계속하는 어떤 집단에 이 정도 수위로 대한 건 오히려 많이 배려한 게 아닌가?      


이건 감사해야 할 일이지 화를 낼 일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는 문재인 대통령은 천주교인이고 이낙연 전 총리와 정세균 현 총리는 장로교 교회를 다니고 있다.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어서 기독교를 탄압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달려가 서명한 사람이 하루 만에 27만이라.   



미국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


이 사건은 나에게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편협함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자기만의 좁은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이다. 그 테두리는 미국식 기독교다.     


 초창기에 미국인 선교사가 많이 들어왔던 것 말고도 결정적인 까닭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생존을 미국의 원조에 의지한 기간만 10년 가까이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기간에 원조 금액을 보면 미국이 대한민국의 은인이라는 걸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한국이 좋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국익에 근거해 결정한 것이지만.      


그래도 소록도 기념관 같은 데에 가보면 미국 시민들이 진심으로 한국을 도왔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더더구나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준 미국이 그때도 지금도 최강대국이자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 기독교의 안경 외에 다른 기독교의 안경을 써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게 사실은 이 세상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걸 한국 기독교인이 모른다는 거다. 안 그래도 육로라곤 중국 밖에 없었는데 북한으로 인해 그것마저 막혀 섬나라가 된 지 70년.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갇혀 있는지 너무 모른다.      


동방 정교회는 성탄절이 1월 7일이다. 12월 25일은 로마 카톨릭의 달력에 근거했고 개신교는 이 교회 달력을 따르는 것.


예전에 유럽에 여행 갔다가 처음으로 동방 정교를 접하고 나서, 그들이 보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얼마나 세상 끝으로 가지치기해서 뻗어나간 분파로 보일까?’ 생각해보았다. 믿음에 본류는 없지만 신앙 양식에 본류를 따지자면 그쪽이 줄기고 우리는 끄트머리 가지인 셈이다.     


향을 피우고 기도문을 외우는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동방 정교를 향해 불교 형식과 비슷하다고 투덜대는 한국 기독교인(실제로 만나본 적이 있다)을 그들이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듣고 2000년 동안 초대교회의 믿음을 직계승해온 그들 입장에서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우물 안 개구리


‘내가 배운 것만이 전부’라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착각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성경에 있으니 옳다는 건 더 위험한 생각이다. 성경은 그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는 구절도 있다. 둘 다 바울이 한 말이다.      


저 두 구절만 비교해도 무엇을 행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하물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구약 전체를 요약해 두 번째 중요한 계명으로 못박아두셨다.(첫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     

 

어떤 특정한 순간에 양립하기 힘든 성경의 두 구절 중 하나를 우선 실천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당연히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어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보다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이웃에 대한 배려보다 당장 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는 것이 더 급한 것 같다. 나를 위해, 내가 믿는 원칙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등한시하는 이런 태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지난 3월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도 끝까지 현장예배를 포기하지 않아 주민과 갈등을 빚은 서울의 한 대형교회



당신이 방언도 하고,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도 하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해 시간과 돈을 내어주고, 심지어 대신 죽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를 보신다. 교회에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가, 성경을 얼마나 아는가, 봉사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당연히 직분이 무엇인가도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얼마나 예수님을 믿고 이웃을 사랑했는가를 보신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후의 이야기다. 내 판단이 잘못된 건지 자신이 없어졌던 나는 주변에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나의 의견과 비슷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 카톡을 받았어도 나처럼 그 캠페인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는 대략 900만이라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19와 서양인의 개인주의(마지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