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활용법
우리는 흔히 감정을 좋고 나쁜 것으로 분류한다. 사실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바라볼 줄 알면 그것을 둘로 나눌 필요는 없다. 모든 감정에는 저마다 고유한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는 부정적인 감정을 생존과 성장을 돕는 중요한 신호로 해석하기도 한다.
감정을 다루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감정을 담는 그릇이라면, 감정은 그릇에 담긴 물과 같다. 그릇에 맑은 물과 흙탕물 중 어떤 물을 담을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본래 흙탕물 또한 흙이 섞이기 전에는 맑은 물이었다. 잠시 시간을 두고 흙이 가라앉으면 물은 정화되고 다시 쓰임이 생긴다. 본질은 똑같은 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우리의 감정도 시간을 두고 제대로 정화하고 나면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의 경계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흔히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내 마음대로 안돼.”라고 말한다. 우리는 정녕 자유의지를 갖고 있음에도 정말 자신의 마음 하나 통제할 수 없는 걸까?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은 예외로 두겠다. 사랑에 빠진 순간조차 불행한 영혼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므로.)
나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결핍으로 인한 외로움이나 불안함은 이따금씩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감정들을 다룰 줄 몰랐던 과거에는 그저 그 시간을 버티거나 회피하는 게 전부였다. 대부분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느라 더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 하지만 핵심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다.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마음의 방문을 두드리면 그렇게 달갑지만은 않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불현듯 찾아오면 나는 이른바 생각의 방으로 자리한다. 나의 의식은 센서불을 켜고 그 감정들을 느껴준다. 방안의 모든 배경은 어둠으로 변하고 조명은 의자에 앉아있는 오직 나 자신만을 비추는 듯하다. 그러고 나면 나는 바닷물에 두둥실 떠있는 것처럼 온몸의 힘을 빼고 그것을 지켜본다.
“아! 외롭구나 이러한 감정들이 어디서 왔을까?” 하고 물어본다. 생각보다 답은 쉽게 나온다. 현재 나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의 모든 생활을 혼자서 하는 나는 고립감을 느껴왔고, 그 원인은 사회적 연결을 원하는 에고의 목소리였다. 이렇게 감정을 대상화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막연했던 공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원인을 알고 나면 감정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든다. 그럼에도 그 감정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준다. 그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얼마간의 시간이 침묵과 함께 흐르고 나면 이 감정은 온대 간데없이 사라진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듯 우리 마음에도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대부분은 이 아이를 외면하거나 다그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와 맞서 싸우는 대신 어르고 달래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줘야 한다. 우리는 이 아이를 내면아이라 부른다.
감정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손님처럼 찾아오지만 그 방문에는 이유가 있다.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기보다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방문 목적을 물어봐야 한다. 나를 찾아오는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스무고개 하듯 질문을 던지면 마음에서 답을 해준다. 그러고 나면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흐릿했던 시야가 마치 초고화질 모니터를 바라보듯 관찰하는 시야가 어느새 선명해진다. 우리 내면에는 누구나 일상의 소음에 파묻혀 흐릿해진 마음을 초고화질 모니터처럼 선명하게 비춰주는 상위 버전의 자아가 있다. 나는 나의 상위자아에게 자주 지혜를 묻곤 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껴줌으로써 나의 결핍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나면 더 이상 감정을 소모품으로 해석하기보다 나를 일으키는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다. 마음은 저항을 멈추고, 삶은 물 흐르듯이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고 가벼워진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외부 조건에 의해 채워지는 즐거움이 아니라 내면의 소란이 잦아든 평온에 가깝다. 설사 나의 평온이 흔들린다 하더라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쓸모없는 감정은 없다. 모든 감정에는 저마다의 귀한 쓰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