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써보려 합니다.
며칠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에 슬픔이 가득했다. 외삼촌께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본가에 다녀가신 모양이다. 외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에서 엄마가 한 달만이라도 직접 모시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 자식 된 도리를 다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혼자 거동하기 힘들 만큼 기력이 없으신 데다 연로하셔서 기억력이 온전치 않으시다. 하지만 엄마도 이미 손주를 넷이나 둔 할머니인 데다 여전히 현역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계신다. 결국 외삼촌댁 근처 병원으로 입원하기로 결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삼촌이 많이 우신 듯했다. 야윈 할머니와 우는 삼촌을 보고 있자니 엄마의 마음에도 눈물이 가득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아무래도 나이가 연로하신 만큼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엄마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그저 수화기 너머 울기 직전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게 전부였다. 언젠가 나 역시 같은 입장에 놓인다면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 거대한 파도를 막아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엄마를 위로하라고 자꾸만 나를 부추겼다. 밤늦게 다시 전화가 와서 고민 끝에 조심스레 입을 뗐다. 사실 나는 아직 가까운 주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떠난 보낸 경험이 없다. 그래서 죽음이란 그 무거운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젊고 건강한 내가 말하기엔 시건방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히 같은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내가 온전한 위로를 건넬 순 없겠지만 평소 내가 가졌던 죽음에 대한 관점을 나누고 싶었다.
1. 귀향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은 존재의 상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 다시 못 보는 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더욱 영혼의 관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관점이 아닌 영혼의 관점에서 죽음을 이야 하고 싶었다. 지구별 체험을 마친 영혼이 옷(육체)을 벗고 나면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은 우리가 흔히 두려워하는 지옥이나 심판 따위는 없다. 신은 단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간을 지옥에 보낼 만큼 속이 좁지 않다.
남겨진 이들의 슬픔과 반대로 영혼의 입장은 다르다. 무거운 육체를 벗어나 본래의 온전하고 가벼웠던 모습과 함께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돌아가셨습니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도 아마 이런 본향으로 회귀를 뜻하는 게 아닐까. 영혼의 세계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숨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죽음은 귀향과도 같다. 비록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순 없어도 우리가 떠난 이를 그리워하면 영혼은 꿈이나 다른 형태로 잠시 우리 곁을 머물기도 한다. 물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현상들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과학보다 현상이 먼저 존재했었고 그 현상을 과학이 증명해 왔다는 사실이다. 과학이 그것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상이 먼저고 그것을 증명하는 과학은 늘 그다음이었다.
2. 죽음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낸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저서에서 "죽음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낸다"라고 말했다. 살아가며 나라고 믿어왔던 것들(직업, 재산, 사회적 지위, 평판)은 사실 진정한 내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껍데기일 뿐이다. 죽음은 이러한 부수적인 것들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만들며 우리를 본질로 회귀시킨다.
모든 겉치레와 형상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남는 순수한 존재, 그 자체가 진정한 우리라는 것이다. 죽음 뒤에 우리는 가장 순수한 존재인 영혼의 본모습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입체적 현실의 한 면만 보고 감정과 생각으로 해석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생과 사 전체를 넘어서 그것을 관통하고 진실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졌다. 때문에 영혼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렇게 슬픈 일만은 아닐 것이다. 존재는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펼쳐지고, 영혼은 이 여정 속에서 조금씩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죽음은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했던 존재가 가장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우리 곁에 다른 방식으로 머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