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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생각에 잠겨

담양 명옥헌

by 월하랑

이 작고 단순한 정원을 방문할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설렌다. 좋은 의미의 설렘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잘 있었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담장 없는 정원들이 겪는 수모를 명옥헌도 겪을까 봐 드는 생각이다. 못을 둘러싼 돌들이 갈아치워지진 않았을지, 혹은 400년 된 배롱나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봐 무섭다. 이번엔 백일홍이 핀 여름에 방문했다. 처음엔 비 오는 가을에 왔었고, 그다음엔 햇살 좋은 봄에 왔었다. 계절마다 보여주는 매력이 다른 명옥헌이 고맙다. 같이 온 일행들이 자기는 이 더위에 절대로 이만큼 걷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나 역시 여름과 겨울에는 정원을 오지 않는다. 날씨가 힘들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좋게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이제껏 그 유명한 백일홍 핀 명옥헌을 보지 못했다. 정원에 들어가기 직전 자연이 만들어놓은 터널에서 멈췄다. 주차장에서부터 은근히 오르막길인 좁은 골목을 걸어야 했다. 이 터널을 지나면 명옥헌이 등장한다. 잠시 멈추고 명옥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 이렇게 더 안달 나게 해서 정원의 감흥이 커지길 바라는 것도 있고, 정원의 진입방식을 어떻게 연출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와아” 감탄이 터져 나왔다. 백일홍이 만발한 정원의 모습은 사진으로 보던 그 이상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실 백일홍이 아니더라도 명옥헌은 아름답다. 백일홍에 정원의 진정한 가치가 가려지는 것 같아 명옥헌을 설명할 때면 꽃 이야기를 애써 피했었다. 하지만 백일홍이 만발한 정원은 더운 날씨가 주는 불쾌감을 날려버렸다.

자유롭게 정원을 느끼다가 명옥헌에서 만났다. 정원의 종착지는 명옥헌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명옥헌에 앉아 지나온 걸음을 다시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생각에 잠긴다. 누구와 와도 마찬가지다. 정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찾아오는 정적이 어색하지 않고 각자의 생각에 잠기게 된다. 상념에 빠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건물이 놓인 지형의 높이와 위치, 점점 좁아지는 지당의 형태, 나지막한 키의 배롱나무, 큰 나무들은 건물 뒤와 왼쪽으로만 배치한 것 등이 모두 상념이라는 정원의 연출 의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 가지 종류의 나무가 만든 길은 공간을 단순하게 한다. 단순한 공간을 걸으면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된다. 메타세쿼이아 길이 주는 효과를 생각해 보면 위로 높이 뻗은 나무들에서 해방감과 생각의 확장을 경험한다. 반면 아담한 크기의 배롱나무 길은 차분해지면서 생각에 잠기는 효과를 가져온다. 마치 천장이 높은 성당에서의 경험과 일본 다실의 낮은 공간이 주는 분위기 차이와 같다. 배롱나무의 낮은 수고는 빛도 조절한다. 이파리 사이로 새어드는 빛들로만 채워진 숲길은 잔잔함을 더해준다. 터널이 끝나듯 배롱나무 숲길의 어두움에서 벗어나면 밝은 빛과 함께 언덕 위 정자가 보인다. 정자 앞으로 들어가 보려고 올라서면 아래로 구덩이가 파있어 오를 수 없다. 뒤로 돌아가면 신발을 벗고 쉽게 오를 수 있는 디딤돌이 보인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다시 어둠으로 들어간다. 낮은 문 때문에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보면 방문이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하나의 장면으로 담긴다.


생각에 잠길 때면 자연스레 눈을 아래로 뜨게 된다. 반대로 눈을 아래로 뜨면 자연스레 생각에 빠진다. 명옥헌 난간에 기대앉아 아래의 정원을 보고 있으면 상념에 빠지는 이유이다. 건축물 아래로 정원이 있는 경우는 많다. 보통은 권력을 내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건축을 높은 곳에 두거나, 높게 짓는다. 명옥헌은 언덕 위에 있지만 권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언덕의 높은 정도와 기울기의 절묘함이 권력이 아닌 상념을 경험하는 정원이 되게 하였다. 상념에 빠진 사람들에게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린다. 계류의 물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맑다는 뜻의 명옥헌의 물소리는 상념을 돕는다. 생각에 잠기기를 좋아하는 나는 명옥헌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처음 왔던 늦가을 평일 이른 아침에는 아무도 없어서 한참을 그랬다. 점점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정원에 앉아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 오는 명옥헌의 모습도 눈에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짐을 챙겨 나가는데 비에 젖은 배롱나무의 수피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가던 길을 되돌아와 사진으로 담았다. 아무도 없는 명옥헌과 나만이 추억하는 비밀이 생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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