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
강진 다산초당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부용지지만 정원은 향유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왕과 신하가 어떻게 어울렸는지 정약용이 남긴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배를 타고 즉흥 시 짓기 대회를 열곤 했는데, 왕이 운을 띄우면 즉석에서 시를 완성하는 놀이였다. 만약 실패하면 지당 가운데 섬으로 유배를 당했다고 한다. 또 다른 놀이로는 낚시 대회가 있었다. 지금도 부용지에는 잉어가 산다. 정약용은 낚시 대회만 하면 실력이 좋지 않아 유배를 당하곤 했다고 한다.
정조가 죽은 바로 이듬해인 1801년 정약용은 유배길에 올랐다. 18년의 유배기간 중 초반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주막과 사찰을 떠돌았다. 그러다 자리 잡은 것이 백련사 아래 어두 컴컴한 산 중턱이었다. 이곳에 그는 다산초당을 지었다. 왕의 신뢰를 얻고 중앙 정계에서 꿈을 펼치다가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여기서 500여 권의 책을 써냈다. 부용지 주변을 거닐고, 주합루 아래를 내려다보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 꿈꿔왔던 생각들을 책으로 남겼다. 언젠가 자신의 때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글을 읽고 실현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경세유표, 흠흠신서, 그리고 목민심서이다.
다산초당에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험난했다. 아무리 유배신세라고 해도 정약용이 이런 곳에서 지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햇빛하나 들지 않는 좁고 어두운 곳에 건물 하나와 작은 지당이 있을 뿐이다.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싶을 수 있겠지만 유배지 정원은 이곳이 유일하다. 제주도에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정원은 아니다. 정원이 그럴싸하지 않은 것은 유배지이기 때문이다. 초가집 옆에 정원이라니, 마치 반지하에 살면서 람보르기니를 끌고 다니는 격이다. 지당을 만드는 것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지당의 역할은 다양하다. 정원에서 감상의 주요 대상이다. 이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수도시설이 없던 조선시대에 저수조, 혹은 물탱크의 역할을 해준다. 산 중턱에서 물을 구하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홀로 지내던 유배지가 아니었다. 하나의 출판사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함께 생활하며 책 제작에 힘쓰던 곳이었다. 그런 필요로 만들어졌겠지만, 초가 옆의 지당은 여전히 어색하다. 지당 옆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하루 종일 글을 쓰느라 앉아 있었던 정약용이 초당에서 나와 허리를 두드렸다. 산 중턱에서 잠시 머리를 시키고 싶은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곧이어 지당으로 다가와 돌아다니는 잉어를 감상하였다. 지금도 다산초당의 못에는 잉어가 살고 있다. 정약용은 잉어를 무척 아껴 집을 오래 비울 때면, 잉어에게 밥 주기를 잊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잉어가 헤엄치는 모습만 보고도 날씨를 점칠 정도였다니, 잉어에 대한 그의 각별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지당의 잉어를 보며 부용지 낚시 대회에서 번번이 유배당하곤 했던 추억을 회상하는 그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부용지에서 왕과 함께 했던 시간들과 나눴던 대화들이 생각나 책에 담아야 할 내용들, 놓치지 말고 주제로 삼을 만한 것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작은 초당으로 몸을 구겨 넣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초당 옆 사치스러운 지당이지만 18년의 유배를 견디려면 꼭 필요했을 거라 이해해 본다.
초당 옆으로 난 길을 오르면 정석丁石이라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의 정과 돌 석은 정약용이 직접 새긴 글씨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그의 성품이 느껴진다. 눈에 띄는 것은 석에서 밑으로 조금 긴듯한 두 번째 획이다. 담담한 표정의 그는 어떤 시련이 와도 변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는 듯하다. 세상은 그를 뒤흔들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잃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듯하다. 글자의 견고함에서 그가 견디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이 느껴진다. 그는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기약 없던 유배에서 18년 만에 풀려나 여유당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후 또 다른 18년의 시간이 지난 1836년에 향년 73세의 나이로 잠들었다. 많은 것을 가졌다가 잃어버린 고통스러운 삶이었지만 누구도 그 자신만은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가 감내했던 것과 세상에 베푼 것들에 비해 누린 것이 상응하지 못했다. 인생은 그렇게 공정하지 못하다. 하지만 결국 오래 걸리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바로 잡는 것 역시 인생이다. 시대의 지성인, 그리고 리더로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렇게 그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정원에서 못다 받은 위로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