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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곳에서 한적하게 살고자

낙선재樂善齋

by 월하랑

궁은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민가 형식의 건축은 궁에서 보기 어렵다. 드물게 볼 수 있는 궁 속의 민가 건축 중에 가장 화려한 것이 낙선재다. '재齊'란 외진 곳에 한적하게 건립하는 건축물로, 숨어서 수신하고 은밀하게 처신하는 곳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8살에 왕이 되어, 23살의 나이로 허망하게 살다 간 헌종은 은신처 낙선재에서 숨어서 은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작은 정조의 죽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영조의 왕비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왕실의 큰 어르신으로 군림하였다. 순조에겐 총명한 아들 효명세자가 있었다. 외척 세력과 대립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던 효명세자는 21살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순조도 믿었던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4년 뒤인 44살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렇게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은 헌종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용히 은밀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조선의 가장 어린 왕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왕들의 죽음과 뒤이은 나이 어린 왕의 존재는 외척 가문들에게 기회였다. 조대비와 대비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끊임없이 다투었고, 이러한 왕실의 소용돌이 속에 어린 왕 헌종이 있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이양선이 출몰하는 등 국제 정서가 급변하는 시기임에도 헌종은 그 무엇도 자신의 손으로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마음 기댈 곳이 간절했다. 그런 그에게 후궁, 경빈 김 씨는 피난처였다. 경빈 김 씨와 함께할 공간이 필요했던 헌종은 창덕궁도 아니고 창경궁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낙선재를 만든다. 낙선재의 위치는 애매하다. 이러한 애매한 위치는 마치 헌종의 정치적 입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할머니 순원왕후의 편도, 어머니 신정왕후의 편도 들 수 없었던 헌종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끼여있는 위치였다.


낙선재 앞 넓은 공터는 본래 여러 겹의 담장으로 낙선재를 감싸았다. 지금은 나지막한 경사로를 내려와 바로 낙선재로 들어가지만 원래는 여러 번의 문을 거쳐야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러 번의 문을 거치는 것은 공간의 위계를 높이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민가 형식 건축물이라 위계가 낮을 수밖에 없지만 왕의 공간이기에 민가 언어 속에서 위계를 가장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낙선재는 세 개의 건축물이 나란히 붙어 있다. 가장 왼쪽이 헌종의 서재인 '낙선재', 가운데는 경빈 김 씨의 거처지인 '석복헌錫福軒', 오른쪽은 조대비 순원왕후를 위한 '수강재壽康齋'이며 이를 모두 통칭하여 낙선재라고 부른다. 석복헌의 복은 아들 낳는 복을 말한다. 무력한 헌종이 왕위 계승을 위한다는 것보다 궁 안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더 좋은 명분은 없었을 것이다. 정통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수강재에 조대비가 함께 생활하였다. 대외적인 명분을 한 겹 벗기고 낙선재를 살펴보면 밀회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문이 굳게 닫히는 적막한 밤이 되면 낙선재와 석복헌 침실 방문이 열리는 것은 아무도 볼 수 없다. 두 침실은 방문만 열면 바로 이어진다. 아무도 모르게, 어떠한 장벽도 없이 서로에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침실이다. 석복헌과 내부 복도로 연결된 수강재보다 문 하나만 열면 바로 연결되는 낙선재와의 심적 거리가 더 가깝다. 낙선재를 지은 헌종의 의도는 분명했다.


낙선재는 아름다운 집이다. 낙선재 창호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조선 최고이며, 누마루 아래의 빙열무늬 역시 화려하다. 조선 후기, 전돌 생산기술의 발전은 아름다운 귀갑무늬 담장을 탄생시켰고, 화계에는 작약과 모란 등의 꽃과 괴석, 그리고 석함을 두어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다. 누군가는 궁에서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라고 하지만, 헌종은 어떤 사대부도 따라 할 수 없는 가장 화려한 민가를 완성했다. 낙선재 뒤에 있는 커다란 석함과 괴석은 후원 규모에 맞지 않게 화려하다. 낙선재 대청마루에서 뒷문의 프레임을 통해 보이는 화계와 괴석은 언제나 인기 있는 포토스폿이다. 이토록 화려한 민가를 지은 것은 아마도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무력함을 낙선재에서 만큼은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낙선재가 완성된 지 채 3년도 되지 않아 헌종은 23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후사를 만들지 못해 정통성을 지키지 못한 경빈 김 씨 역시 궁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후 조선은 나락의 길로 접어들어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후, 낙선재에서 살게 된다. 수강재에 거처하던 순원왕후도, 영친왕 이은도,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혜옹주와 이은의 부인이자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까지, 모두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내다 마지막을 맞이한다. 궁에 있는 여러 화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것이 낙선재이다. 북악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 중 하나가 창덕궁을 향한다. 창덕궁으로 내려오는 산세는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인정전으로 흘러내려오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낙선재를 지나 종묘로 이어진다. 낙선재 화계 위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서울의 랜드마크, 남산타워가 마주 보일 정도로 높다. 높은 곳에서 도성의 경치를 바라보며 조선 마지막 왕가는 하나, 둘 씩 사라졌다. 이 넓디넓은 궁에서, 수많은 전각들을 뒤로한 채 낙선재에만 머물 수 있었던 조선의 마지막 왕족의 좁은 입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름다운 화계 위, 탁 트인 경관을 바라보는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 자리 잡는 것을 지나온 세월의 장면들을 말없이 담아 온 정자를 탓해본다. 주변이 모두 다 틔워져 있는 경치가 오히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외딴섬처럼 느끼게 했다. 정치적 무력감을 낙선재에서만큼은 느끼고 싶지 않았던 헌종의 바람과 달리, 조선의 마지막 왕가는 정치적 무력함을 낙선재에서 겨우 버텨냈다. 왕가가 보낸 마지막 시간이 화려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낙선재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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