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루와 화계

장소의 잠재력을 읽어내는 눈

by 월하랑

'집으로 오세요.'


마포구 북아현동에 산다고 했다. 마당 딸린 주택이라고 한다. 얼마나 부자면 서울시내에 마당 딸린 집에서 살까 싶었다. 수수했던 그녀에게 느껴지는 여유로움은 역시 돈이구나 싶었다. 그는 그런 게 아니라 했다. 와보면 안다고 했다.


'83 계단을 올라와야 돼요'


스쿠터를 끌고 83 계단 앞에 멈췄다. 나도 가파른 언덕 위의 집에 살고 있지만 계단 위의 집이라. 워낙 튼튼한 허벅지를 타고나 척척 계단을 오르니 개들이 짖었다. 여기가 맞나 다시 한번 주소를 보고 있으니 작가님이 나왔다.


'오셨어요?'


대문을 열고 펼쳐진 풍경은 정글이었다. 너른 마당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개들이 정신없이 짖어대는데 눈앞에 도시 정경이 펼쳐졌다. 높다란 하늘과 저 아래 도시들. 누군가의 집이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다니.


거실은 통창으로 정원과 하나인 듯 보였고, 거실엔 빨래가 널브러져 있었다. 식탁으로 나를 안내한 작가님은 마실 것이며 먹을 것을 내오셨다. 벽엔 아이들의 낙서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집과 반대였다. 강박적으로 정리하고 단 한 번의 낙서도 허용되지 않는 우리 집에 없는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널브러진 빨래는 아이들의 오후 할 일이라고 하셨다. 그녀의 교육관을 들으며 차를 마셨다.


아이들의 나이도 거의 비슷하고 작가님과 나의 차이도 한 살이다. 너무 편하게 해 주셔서 동갑처럼 굴었었는데 얼른 정정했다.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동남아 가는 것이 나의 최대치인데, 작가님은 이미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독일을 다녀오셨다했다. 아직 도시는 아이들과 여행하는 것이 자신 없다며 힘들지 않으셨냐고 했더니 웃으며 별것 아닌 듯 답하셨다.


누구보다 빠르게 작업계획서를 보내오셨다. 인스타에 올라오는 글은 읽었었지만 계획서의 글은 에세이 같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려 깊던 말솜씨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할 때는 한 편의 문학작품처럼 변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처럼 부드럽고 가늘면서도 켜켜이 쌓여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함이 되는구나 싶었다.


태국에서 줌으로 두 번째 미팅했을 때였다. 작가님의 첫 번째 작업계획서를 바탕으로 더 구체적인 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 사이 작가님은 북촌마을서재에 다녀오셨다. 이야기를 해놔서 건물 내부를 볼 수 있게 개방해 드렸다. 미팅 막바지에 작가님은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다.


'그런데요 대표님. 사실 제가 답사를 다녀왔잖아요. 그러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미 구체화시킨 아이디어를 다 이야기 나누고 끝내려던 참이었다.


'어떻게요?'


신을 벗고 대청 안으로 들어와 누마루와 방을 둘러보았다는 설명은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듯 실감 났다. 누마루와 방을 천천히 걸으며 느낀 감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대표님, 저는 제 전시가 이 집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해요. 집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전시의 가장 중요한 부부이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그의 제안은 마을서재의 주변정리를 하는 것이었다. 방의 창을 통해 보이는 화계를 손보고, 누마루 창을 통해 보이는 전경이 제대로 보일 수 있게끔 하는 것이 가장 먼저라고 했다.


'살구나무가 있는데, 제가 손을 봐도 될까요? 좀 다듬으면 좋을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작가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던 나는 그의 내면은 항상 땅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잠재력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기다려준다는 그녀의 교육관은 디자인 철학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녀의 삶이 바로 작업과 하나였다.


어떤 전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러한 과정 자체가 전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원래의 모습을 남겨야지만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나와 작가님은 이러한 과정을 공유하고 있지만 와서 보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나도 7번째 작가가 되어 작은 공간에 전시를 할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던 차였다. 바로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어떤 눈으로 공간을 바라보고 변화시키는지 기록하는 것, 옆에서 지켜본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이것을 주제로 <정원 가는 작업 중>이라는 사진전을 기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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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옆에 붙어 있던 창고를 개조해 만든 사무실로 이동했다. 전시의 내용을 구체화할 때가 되었다. 흙을 전시하겠다는 취지는 알겠지만 단순히 여러 곳에서 채취한 흙을 나열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는 채취한 장소의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글을 읽으면 이런 흙이 있는 곳의 경관은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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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느다란 선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면처럼 그의 작업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28개의 흙은 가장 건조한 것부터 습윤한 것까지 순서대로 나열되었다. 살구나무를 다듬어 비로소 시원하게 보이는 인왕산과 북악산의 기운이 느껴지는 누마루에는 암반의 건조한 흙을 전시하고 화계 쪽 습윤한 방에는 가장 축축한 흙을 두었다.


마을서재 곳곳의 작은 미기후들에 이름을 붙이고 작지만 미묘하게 다른 환경을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오랫동안 머물며 천천히 살펴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러기에 좋은 집이었다.


실크스크린으로 수작업한 수첩은 5본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중 하나는 내 것이라고 했다.

전시가 끝나기 전에 마을서재에 오래 머물 생각이다. 글 하나하나와 흙을 만져보며 그의 내면을 여행할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따뜻한 그의 커다란 눈망울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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