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땐 아니란다
주식계좌를 처음 만든 것은 2017년 여름이었다. 대학원 시절 회계수업을 담당했던 젊은 교수님은 이제 미래의 신성장동력은 AI 이기 때문에 관련 주식에 투자를 하는 것이 앞으로 남은 돈을 버는 많지 않은 방법 중 하나일거라는 상당한 디스토피아적 스토리를 신나게 이야기하며 나를 주식의 길로 이끌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곧장 돌아가 대충 유명하다는(?) 키움증권에 가입했다. 그리고 당시 가졌던 전 재산을 털어 구글 주식을 무려 3개나(300만원 정도) 사버리는 전체 자기자본비율 100에 달하는 대 리스크 투자를 감행한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사 모아 지금은 그때보다는 약간 더 많은 주식을 갖게 되었다. 교수님은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큰 돈은 아니라도 나에게 세상과 돈을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이렇게 사랑스럽게 내 돈을 불려준 키움증권과의 이별이 꽤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 일을 적어보려 하는 것이다. 이 글에는 앞으로 있을 키움증권의 흥망성쇠의 열쇠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나는 다른 증권사에 새로 계좌를 열었다. 이유인 즉슨 키움증권의 UX/UI는 10년을 사용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난해함의 집합체로, 주식이나 재테크에 있던 관심도 사라지는 마법같은 구조기 때문이다. 로그인을 할 때마다 방대한 기능들이 새로 업데이트 되는 듯하며 그걸 다운로드 하는걸 기다리고 있으면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돼 버린다. 이렇게 접속에 대한 장벽이 높으니 주식에 대해 잊고 살게 해주는 순기능이 있다. 어쨌든 새로운 증권사는 수수료나 혜택 등이 약간 더 낫고 모바일 어플 사용법도 좀더 간단해서 만족스러웠다.
사고 팔줄만 알지 상당한 주알못이던 내가 이번 기회에 배운 것은 국민은행에 있던 돈을 하나은행 계좌로 보내듯 키움증권에서 가지고 있던 주식들을 예를들면 가상의 증권사인 쌤승증권으로 넘길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유한 주식이나 채권을 다른 증권사 계좌로 이전하는 것을 "타사대체출고" 라고 한다. 나는 이 타사대체출고를 통해 내가 가진 미국 주식들 중 일부를 삼성 아니 쌤승증권에서 더 활발하게 굴려볼 요량이었다.
방문했던 쌤승증권 지점의 담당자는 타사대체출고에 대해 알려주며 전화 한통만 하면 저쪽에서 이쪽까지 주식들이 넘어오는데 하루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키움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이제 나는 쌤승에서의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키움증권의 멋지고 복잡한 모바일 앱인 영웅문을 통해 타사대체출고라는 단어를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그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뭔가 잘못알고 있는건가?
구글검색을 통해 알게된 것은, 모바일 앱에는 그 기능이 없고 오직 PC 영웅문 HTS나 전화 고객센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들어올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땐 아닌 것이다.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노트북을 켰다. 비밀번호를 두 개 입력하고 파일을 166개 정도 업데이트 하고 난 후에야 영웅문 PC 버전에 로그인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선배투자자들의 블로그에는 이런 저런 경로로 타사대체출고 메뉴를 찾을 수 있으며 직통 단축키까지 친절히 안내돼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쉽지 않았다. 중간까지는 그대로 따라갈수 있는데, 어느 지점 이후부터는 블로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메뉴가 없었다. 혹시 다른 자리로 옮겨갔나? 단축키가 바뀌었나? 이런 저런 메뉴를 눌러보았지만 실패.
그때 내 눈에 띈 기사가 하나 있었다. 25년 2월 날짜.
"[단독] 키움, 해외주식 온라인 갈아타기 전격 중단...메리츠 의식?"
기사의 내용인 즉슨 온라인으로는 이제 해당 기능이 아예 비활성화 됐고 이용자 스스로가 타사로의 주식 출고를 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자기들의 고객센터에서 상담원 연결을 통해서만 가능해졌다는 말이었다. 키움님이 이렇게 내가 말없이 떠날까봐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떠날까봐 이렇게 아쉬워해주는 사람이 이렇게 있다는건 아무래도 고마운 일이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키움증권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안타깝게도 전화연결은 쉽지 않았다. 전화안내 음성은 나와의 대화 전 긴장감을 고조시키려는듯 요리조리 숨바꼭질하듯 복잡한 꼬리물기를 했지만 결국 나는 이내 안내원을 기다릴 수 있는 감미로운 음악이 나오는 단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아니, 과연 그런가? 아니었다. 안내 음성은 중간중간 나의 줄서기에 대한 의지가 약해지진 않았는지, 혹시 온라인 챗봇과의 대화를 원하는지 끊임없이 궁금해했기 때문에 나는 또 하릴없이 2번 메뉴인 '계속 기다리기'를 주기적으로 눌러줘야했다. 자칫 응답이 늦으면 태만의 대가로 전화가 끊길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안내음성의 질문에 2번으로 성실히 답했다.
그렇게 20분정도가 지나 한 남성분이 전화를 받았다. 반가운 그 사람의 목소리. 하지만 공교롭게도 전화 받은 담당자는 이곳이 아니었다. 전화를 받으신 분은 타사대체출고를 담당하는 부서는 따로 있다며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이내 전화연결을 통해 나는 다시 다른 대기줄에 섰고 그렇게 15분뒤 드디어 상담사를 만날 수 있었다.
전화를 받고 본론을 시작하기 전 나는 여기까지 오면서 넘어온 일련의 고난들을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상담사는 이미 나같은 사람을 많이 만난듯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듣는 사람처럼 차분히 내 하소연에 공감해줬다. 아무 잘못도 없는 상담사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게 고마워서 이제쯤 타사대체출고를 부탁하려던 찰나였다.
잠깐. 몇개 종목만 이관하려던 나는 혹시 이것이 키움을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아닌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내가 평일 아침에 36분이라는 시간동안 2번 버튼을 누르며 기약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기회가 닿은 김에 계좌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주식을 전부 다 옮겨달라는 주문을 했다. 장장 36분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타사대체출고는 계좌번호만 알려주는 절차만으로도 정말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수수료로 대적할 수 없으니 키움이 선택한건 물리적으로 막기였나보다. 모바일로는 못하게 만들어서 PC를 켜게 만들고, 그러다 이제는 시간을 내서 전화를 하게 만들고, 기다리는 와중에 다른 일도 못하게 해놓고, 고객센터에서 가능한 서비스 시간도 오전 8시에서 오후 6시 반까지 되던 걸 오후 3시까지로 줄였다. 나는 오랜 시간 대기를 하면서 이 시스템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라 고객이 시도하다가 포기하기를 바라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별을 직시하지 못하고 문제를 피하기만 하는 구질구질한 전남친 같다. 리테일 점유율 국내 1위를 자랑하는 증권사가 이용자 이탈을 막는 방법이 고작 고객의 불편함을 가중시키고 뺑뺑이를 돌게 하는 거라니 이런식으로 맞서는 게 과연 그들의 최선이었을까?
드문 일은 아니다. 클릭 한번이면 무료 체험판에 할인에 세상 환영해주는 서비스 구독/가입 버튼과는 달리 구독취소나 탈퇴 메뉴는 항상 구석에 힘없는 얇은 글씨로 옹색하게 쓰여있었다. 그마저도 버튼이 있으면 양반이고 메뉴를 교묘히 숨겨놓거나, 미궁같은 전화 고객센터 안내 등 마치 이걸 찾느라 구독 취소를 포기하길 바라는 것 같은 장치들은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지켜낸(?) 고객의 숫자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용빈도는 낮고, 먼지만 쌓여가는 유령 계정들과 함께 자신만의 발전없는 왕국에서.. 너무 외롭지 않을까.
그래도 서툰 주린이 투자자인 나와 지금까지 함께해 준 키움과 영웅문.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도 건승하시길. 고객서비스는 개선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