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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공이 Jan 19. 2021

인간의, 가족의 민낯[프란츠 카프카, <변신>]

책임과 의존, 차가움과 자기 위안 사이


 ‘변신’의 설정과 스토리는 고등학교 때 심심치 않게 들은 기억이 있지만 제대로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나이 드신 부모님과 곧 음악학교에 보낼 여동생을 부양하는 주인공 그레고르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자기 몸이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납작한 몸, 정신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여러 개의 손들, 기계음이 섞인 것처럼 이상하게 변해가는 목소리. 그레고르는 하루아침에 바퀴벌레가 되었다.

 특이점 하나. 자기 앞에 실재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상황에 대처하는 그레고르의 반응. '아, 이번 망상은 언제 끝나려나.' 실적의 압박 때문인지 이미 쫓기는 꿈, 안 좋은 꿈을 많이 꾼 걸로 추정되는 그레고르는 지금의 상황도 그저 망상 내지는 꿈이라 치부하고 다시 자신의 ‘일’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짠하기 그지없다. 분명 이 사달을 어쩌면 좋지, 난 왜 지금 바퀴벌레가 되어 있지, 가족들 눈에도 보이나, 가 정상적인 반응일 텐데. 그저 '빨리 정신을 차려야 출근을 할 수 있는데.' 류의 생각과, 조금 더 있으면 사장이 찾아올 텐데, 사장이 오면 어떡하나, 목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질 텐데 어떻게 해서 사장을 돌려보내고 내일 출근할까 와 같은 걱정뿐. 자기 목숨, 어찌 보면 실존(?)이 걸린 심각한 문제보다 출근, 일, 돈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팍팍한 현실. 자신의 참담한 상황을 가족들에게 속 시원히 밝히지 못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려는 의미 없는 모습 속에서는 그레고르가 ‘부양할 능력이 있어야 가족에서 의미 있는 존재’ 임이 느껴져 씁쓸했다.


 두 번째 특이점. 그레고르가 자신의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점액질을 흘리는 바퀴벌레가 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레고르가 사람으로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버린 가족들에게 그레고르가 큰 짐덩이가 되고 난 후다. 그레고르의 급료에 의지해 의존적으로 살던 가족들의 눈부신 변화가 매우 당혹스러웠다. 집에서 무력하게 앉아있던 아버지는 새로운 직장을 구해 늠름한 모습이 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막막해지자 빈 방에 세를 놓는다든지, 지출을 줄인다든지, 일감을 찾는다든지. 무척이나 야무지게 일상생활을 잘 해낸다. 알고 보니 스스로 잘 판단하고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그레고르의 가족들이 그레고르에게 무언의 희생과 책임을 지우고 일종의 무임승차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일해 왔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자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도 쫓겨난 듯한 그레고르의 모습이 더불어 씁쓸 포인트.

 세 번째는 바퀴벌레라는 설정이 가져다준 특이점. 바퀴벌레가 되었기 때문에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건 맞지만, 그래도 바퀴벌레라는 설정이 그저 가장의 역할을 못 하는 핸디캡만을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만약에 그레고르가 한 마리 귀여운 다람쥐로 변했다면 혹시나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가 이 커다랗고 징그러운 바퀴벌레의 외양과 행동 묘사를 열심히 해 놓은 탓에 글로만 바퀴벌레를 생각하는 나도 무섭고 소름이 끼쳤는데, 가족들은 오죽했을까. 큰 몸집에 방 여기저기를 빠른 속도로(엄청나게 많은 손과 함께) 기어 다니며, 점액질을 이곳저곳에 흘리며, 사람일 때 좋아하던 음식엔 도 대지 않은 채 더럽고 썩은 음식물 쓰레기에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감내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손톱보다 작은 바퀴벌레에도 혼비백산하는 나여서 그런가, 혹시 나만 그런가?). 존중에서 방치로, 혐오로 변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행동은 가히 무섭지만, 나였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덮어놓고 그레고르의 가족들을 욕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바퀴벌레와 오버랩된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치매'라는 질병이다. 사랑스럽고 고마웠던 존재가 치매라는 병을 만나고, 이미 손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봐 왔다. 나와 함께한 기억은 모두 없어지고, 기본적인 생리현상을 자연스레 해결할 수 없고, 때로는 나에게 못되게 굴고, 때로는 나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리는 상황. 벽에 똥칠을 해 두기도 하고, 이상한 것을 음식이라고 먹어버리기도 하며, 내가 소중히 아끼던 것을 망가뜨리기도 하는 상황. 그 상황들을 바퀴벌레가 된 그레고리의 상황과 오버랩하니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바퀴벌레가 된 가족임에도 좋아하는 음식을 놔주고, 움직일 공간을 마련해 주고, 숨을 공간도 마련해 주던 가족들도 나중엔 '가구가 걸리적거리니 다 치워 줘야겠다(그레고르는 인간으로서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다.)’고 자신들의 편의와 상대방의 의중을 동일시해 버린다. 그레고르를 돌보는 역할을 하는 동생은 가족에게 무언의 우월감-가족의 더러운 것들을 치워 주고 돌봐 주는 역할을 도맡는 천사-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만이 그레고르를 돌본다며 그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해 히스테리적 반응을 하기도 한다. 후반부에서는 결국, 여동생의 바이올린 소리를 알아채고 용기 내 거실로 나온 그레고르를 보며 여동생은 혐오감과 분노감을 폭발하듯 표출하고, 그레고르의 아빠 또한 그레고르가 죽든 살든 알 바 아니라는 듯, 방에 들어가 버리라며 물건을 사정없이 던져 버린다. 물론 몸과 마음 모두 뒤죽박죽 엉망이 된 그레고르는 끝까지 방치된다.

 정리해서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여러 가지 생각과 짧은 감상들이 뒤죽박죽 떠오르던 책이었다. 바퀴벌레라는 설정에 대해 고민하다 심한 치매라는 질병을 떠올린 이후에는  특히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손주들이 오면 여기저기서 모아뒀던 꼬깃꼬깃한 돈들을 주섬주섬 꺼내 주시던, 약간은 완고하셨지만 관심과 사랑을 주시던 할머니가 변했을 때, 나는 할머니한테 어떻게 했나? 나도 결국은 결만 다를 뿐, 그레고르의 가족과 근본적으로 다르진 않았다. 차가웠고, 무덤덤했으며, 때로는 병 때문에 나온 행동임에도 그걸 보고 분노하기도 했으니까.


 내 경험 때문에도, 이야기 때문에도 씁쓸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할머니에게는 우리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늦둥이로 아빠를 낳아 공개수업 때도 혼자만 쪽진 머리를 하고 오시던 할머니를 부끄러워한 적도 있었다고 하셨으나 내가 봐온 오랜 기간 동안 할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공경했다. 할머니가 어떤 상태이심과 관계없이 아빠는 할머니께 깍듯했고 충실했다. 똑같은 말을 네 번, 다섯 번 반복할 때도 작은 짜증조차 내지 않으셨다. 나중에 아빠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셨을 때는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 할머니가 큰아버지 댁에서 같이 지내지 못할 만큼 상태가 나빠져 요양원에 계실 때도 자주 할머니를 만나러 가시며, 아빠에 대한 실마리를 떠올리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갔을 때도, 할머니의 영정을 모신 빈소에서도, 호상이라는 말은 듣기 싫다고, 날 못 알아보아도 좋으니 돌아가시지만 않으면 좋겠다고, 어떤 모습이라도 좋으니 살아만 계셔도 좋겠다고 하셨다.

 오랜 시간 병을 앓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거의 지배적이었는데, 글을 쓰고 나니 할머니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존재와 함께하셨던 복 있는 분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레고르의 가족들도 차가웠고 나도 차가웠지만, 누군가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어떤 모습이라도, 어떤 상황이라도 존중하고 사랑해 준다. 그리고 글의 차가운 현실에 막막해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주 가까이서 그 모습을 본 사람이었는데, 그리고 더 먹먹하게도 난 그 사실과 할머니를 그저 잊고 지내왔다. 이야기의 허무맹랑한 설정 덕분에,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잊고 있던 소중한 사람과 기억을 떠올리게 된, 따뜻하고도 조금은 시큰한 밤이다.


P.S. 난 누군가에게 아빠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나를 그렇게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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