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본 디 베네치아 | 제5편
그럼 하프시코드를 자신의 악기로 삼은 이 실내악의 거장은 어쩌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자신의 인생의 무대를 옮기게 된 걸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선 이 여성이 빌헬미네 후작과 프리드리히 3세의 궁정에 고용된 연유가 된 그들의 본래 직업에서 찾아봐야 한다. 조금 더 이 여성과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앞으로 돌려보자.
지롤라모 본의 다채로운 능력은 본래부터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하였다. 그와 그의 가족들이 빌헬미네 후작의 궁정에 고용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전도하는데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던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라. 이윽고 한 곳에 정착해 브란덴부르크 바이로이트의 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한 아버지는 이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정을 잊을 수 없었다. 이 열정은 바이로이트 궁정의 가수로 고용된 어머니도, 그리고 바이로이트 궁정의 실내악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잊을 수 없었을뿐더러 시간이 지날수록 상기되곤 하였다. 시장 광장에 모여든 평민부터 거대한 극장을 화려한 옷차림으로 빼곡하게 앉은 귀족들까지 다양한 신분의 청중들 앞에 올라서서 오페라에 대한 열정을 쏟아부어 그들을 감동시킬 때의 그 전율을. 그래서 이들은 빌헬미네의 궁정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한없이 제공할 때에도 이들의 마음은 이따금 숨겨둔 날개를 펼쳐 인근 도시의 가장 큰 광장 위에 날아가 그 주위를 맴맴 돌곤 하였다.
지롤라모 본과 그의 가족들이 유럽 도시 곳곳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는 사실은 오늘까지 자료로 남아있다. 바로 이들이 바이로이트 궁정으로 갈 수 있었던 통로가 된 독일의 자유로운 도시 중 하나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활동할 당시 제작된 공연 전단물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던 것이다. 당시 레겐스부르크를 지배한 이들은 유럽의 우편 시스템을 설립한 고귀한 귀족, 트룬 운트 탁시스 Thurn und Taxis 가문이었다. 이들은 지롤라모 본과 그의 가족들이 지닌 음악적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들의 소유 중 하나인 프랑크푸르트의 아름다운 신식 극장이 세워진 자신의 궁정으로 이들을 초대하였다. 물론 이들의 공연은 많은 이들의 공감과 환희를 자아내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자신의 궁정에 초대받은 많은 귀족들을 감동시킨 모습을 지켜본 트룬 운트 탁시스의 일원이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누이인 브란덴부르크 바이로이트의 소피 크리스틴 루이스와 결혼한 왕자, 알렉산더 페르디난트 폰 트룬 운트 탁시스 Alexander Ferdinand von Thurn und Taxis는 직접 이들을 독일의 찬란한 자유 도시 프랑크푸르트 순회공연을 제안하였다.
지롤라모 본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전파하는 전도사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궁정은 제외하고 도시에서는 아직 신식 오페라 극장이 없는,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환경은 아무 제약이 되지 못했다. 당연히 그는 무대 제작자이자 화가였으니 말이다. 열악하고 조악한 프랑크푸르트의 한 극장은 지롤라모의 손을 거쳐 근사한 오페라 극장으로 변모하며 본 극단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당시 부퐁 논쟁으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그 문제작,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Giovanni Battista Pergolesi의 막간극 ‘마님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는 물론 지금은 듣기만 해도 생소한 오페라 코미크들이 줄지어 공연되었다고 한다.
이윽고 이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지막 공연을 남겨두고 있었다. 지롤라모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당시에는 하늘을 치솟을 정도로 인기 있었던 작품, 빈센초 레그렌지오 참피 Vincenzo Legrenzio Ciampi가 작곡한 ‘태만 Il Negligente’이라는 작품을 선택하였다. 지롤라모는 공연을 준비하며 자신의 손에 든 오페라 대본에 짧은 메모를 남기기 시작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역을 배분하기 위해 메모한 것이다. 그가 남긴 이 메모에서 우리는 생소하지만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안나 본'이라는, 매우 익숙하면서도 지롤라모 본 극단 사상 가장 생소한 그 이름을. 안나 본은 베네치아의 오스페달레를 졸업한 이후 아버지를 따라 브란덴부르크 바이로이트 궁정으로 향하기 전, 잠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들려 아버지의 기업에 함께 참여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안나는 다양한 신분을 가진 청중들의 앞에서 자신의 노래를 전달한 이후 소탈하고 열정적인 환호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지롤라모와 그의 가족들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빌헬미네와 프리드리히 3세 후작 부부에게 간절하게 청을 올렸다. 자비롭고 인자한 후작 부부가 내려준 귀중한 교수직, 가수, 그리고 실내악의 거장이라는 칭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직업이 되었다고. 하지만 휴식기에는 한 번씩 주변 도시로 순회공연을 펼치고 싶다는 의사와 함께 우리들의 아름다운 유산인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주변 국가에도 오롯이 알려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도 함께 전하면서 말이다. 이를 들은 후작 부부는 이들의 음악의 열정을 알아보고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이미 훌륭한 교수로 알려진 아버지와 음악적 재능을 아낌없이 펼치는 그 가족들의 청을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니 말이다.
지롤라모 본은 허락이 내려진 즉시 짐을 꾸려 사랑하는 아내, 로사와 사랑하는 여식, 안나를 데리고 인근 도시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한 도시에서 아름다운 오페라를 전파하면 이들의 마음은 더 큰 욕심이 부풀어올라 더 먼 도시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들이 마음속에 지닌 이탈리아 오페라를 전도하겠다는 사명은, 빌헬미네 후작이 떠난 1년 후인 1759년엔 거대한 도나우 강이 펼쳐진 아름다운 도시,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로 발걸음을 인도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독일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사랑한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 Johann Adolph Hasse의 작품을 선별하여 청중들에게 선보였다. 하지만 인근의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하여 어느 순간 헝가리까지 도달한 이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1761년, 지롤라모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프리드리히 3세가 하명한 원근법 교수직을 내려놓고 더 먼 곳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되었다. 바로 오스트리아의 아이젠슈타트 Eisenstadt, '철의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이 도시의 차가운 이미지와 다르게 한 음악가의 업적으로 오늘날까지 서양 고전음악의 성지로 부상한 이 도시로 말이다.
호화로운 의상, 찬란한 궁정, 그리고 황홀한 오페라를 사랑하기로 유명한 아이젠슈타트의 지배자, 에스테르하지의 왕자, 니콜라우스 1세 Nikolaus I, Prince Esterházy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본 가족에게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이들이 무대 위에서 펼친 음악에 저항 없이 가여운 포로가 된 니콜라우스 1세는 무대가 막을 내리는 즉시 이들을 고용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762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본 가족은 니콜라우스 1세가 운영하는 에스테르하지의 궁정 음악가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니콜라우스 1세는 빌헬미네 후작과 다르게 세상의 상식대로 지롤라모 본을 제외한 두 여성은 음악가로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가 본 가족과 계약할 당시 계약 내용을 살펴보면 니콜라우스 1세의 이러한 성향을 잘 살펴볼 수 있다.
금년 금일 화가 르 본 Le Bon과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딸은 1년 동안 우리에게 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수락하였다. 특히 연극과 관련하여 그의 근면함을, 그리고 궁정음악가를 위해 모든 연주와 노래, 그리고 합창에 필요한 그 아내의 노래 실력이 필요하기에 이 모든 임무를 서류에 기록하며 하인들은 이러한 점을 위해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 1762년 7월 1일, 아이젠슈타트에서 히에로니무스 본 Hieronymus Bon에게 제공.
니콜라우스 1세와 계약을 성사시킨 이후 어머니인 '로사 루비네티'와 딸인 '안나 본'은 그 즉시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대신 어머니에게는 '화가 히에로니무스의 아내'라는 칭호를, 딸은 '화가의 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채 새롭게 떠오르는 음악의 중심지,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입성하게 되었다. 안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세상은 자신의 성별을 안 순간 축소되고 엄폐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직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이례적으로 자비롭고 깊은 눈동자를 지닌 빌헬미네 후작이 운영하는 궁정이 별난 세계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안나는 입궁 후 가장 먼저 자신과 함께할 동료를 만나러 향하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궁정의 부악장 Vice Kapellmeister으로 활동하며 어느 순간 궁정 내에서 가장 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그 음악가, 요제프 하이든에게 말이다.
5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 두 사람은 금세 서로의 음악적 재능을 파악하였다. 안나는 자신보다 5살 많은 이 부악장이 지닌 유머러스하고 열정적인 음악 스타일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이든 또한 자신보다 5살 적은 이 여성이 부르는 노래와 목소리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 노래보다 더 큰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는 이전 고용주 밑에서 봉사할 당시 작곡한 작품들을 하이든에게 들려주는 순간 궁정의 부악장은 큰 전율을 느끼며 이 여성은 자신과 잘 통할 것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궁정을 이끄는 부악장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작곡한 디베르티멘토와 파르티타의 음악적 구조가 이 여성이 작곡한 하프시코드 소나타와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나의 주제가 대화를 던지면 그에 응당한 답변이 돌아와야 하는 점, 하나의 주제가 이루는 조성은 이윽고 다른 조로 변조하여 주제의 답으로 돌아오는 점, 그리고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닌 음악이 던지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음악이 던지는 유머를 자랑스럽게 드러내야 하는 점까지. 하이든은 자신이 평소 생각한 기악 음악의 아이디어가 이 여성의 의견과 꼭 맞아떨어지는 기쁨을 즐기며 이 여성과 펼치는 음악적 토론을 즐기게 되었다. 고전 시대에 날개를 펼칠 소나타 양식은 이렇게 두 거장을 만나 성장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의 부궁정악장으로서 자신에게 큰 기쁨을 안겨준 이 여성을 잊지 않고 열심히 그의 노래 재능을 활용하였다. 그는 1763년 1월 에스테르하지 가의 결혼식을 위해 한 오페라를 구상하게 되었다. 현재 악보로 남아있지 않아 오페라에 대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비엔나의 대표적인 신문 중 하나인 '비엔나 일지 Das Wienerische Diarium'에서 이 오페라 연극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신문에 의하면 하이든이 결혼식을 위해 구상한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럼 이 오페라는 누가 연기했을까. 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아마 안나 본의 입술을 통해 축객들의 귀를 즐겁게 하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하이든이 오페라 부파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는 점, 그리고 결혼식과 같은 행사를 전문으로 하는 본 극단의 특성을 고려해볼 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또렷한 증거도 남아있다. 하이든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궁정 내에서 인기를 사로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764년, 하이든은 새로운 음악을 작곡해야 할 또 다른 일이 발생하였다. 니콜라우스 1세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대관식을 거행한다는 소식이 당도한 에스테르하지 궁정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부궁정악장인 하이든 또한 자신의 고용주를 위해 대관식 이후 에스테르하지 궁정으로 귀환할 때를 축하하는 환영 칸타타를 작곡하여 화려함을 사랑하는 왕자에게 기쁨을 선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이든은 칸타타를 작곡할 때 누군가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례적으로 이 부악장이 선택한 언어는 독일어가 아닌 이탈리아어였다. 이윽고 '너의 뜻에 기쁜 마음으로 오너라 Al Tuo arriva felice'라는 제목을 가지게 될 이 칸타타를 부를 사람을, 하이든은 거침없이 악보의 한 귀퉁이에 기록하게 되었다.
제1소프라노 : 시그라 본 Sigra Bon
제2소프라노 : 시라 본 Sira Bon
이 짧은 메모로 인해 학자들은 바이로이트 궁정을 떠난 본 가족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본 부인'이라는 뜻을 지닌 '시그라 본'은 로사 루비네티를,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사이렌을 비유한 '시라 본'은 안나 본을 의미하였다. 하이든은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칸타타를 이끌 소프라노로 본 모녀를 선택하여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돌아오는 왕자를 성대하고 화려하게 맞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노래로 인정받으면 뭐하는가. 또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하프시코드를 위해 기악 음악의 미래를 도모하면 뭐하겠는가. 안나 본은 그저 묵묵히 빌헬미네의 가호 아래 활동한 성스러운 자신의 음악 재능을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도 똑같이 펼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화가 본의 딸'이라는 칭호뿐이었다. 그야말로 이 여성은 그간 펼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실내악의 거장으로 불린 이 여성은 에스테르하지에서 자신의 이름을 잃게 되었다. 그렇게 이름을 잃은 이 여성은 어느 날, 그 존재마저 소리 없이 에스테르하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