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성큼성큼 보폭을 넓히는 날 우리는 단풍을 찾아 나섰다. 문인협회 일에 매달려 식사 끼니 해결마저 소홀하다는 그의 불평도 달랠 겸 시간을 쪼개어 날을 잡아 단양 쪽으로 길을 잡았다.
매년 가는 단풍놀이지만 어느 방향으로 돌아야 할지는 날씨가 관여하여 잡아준다. 그러나 올해는 여름이 너무 뜨겁게 풍경을 몰아쳐서 단풍이 어디쯤 와 있을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창창할 것 같은 기온이 별안간 뚝 떨어지면 나무는 생생하던 잎파랑이가 창문에 노랗고 붉은 커튼을 친다. 그러면 온 산은 싱싱한 채로 단풍이 든다. 그런 해의 단풍놀이가 최고로 멋진 채색화를 볼 수 있는 해이다.
제천의 금성면에 있는 산마루 산채밥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그는 여행의 방향을 잡았다.
“오늘은 장회나루로 가서 배를 타고 옥순봉까지 가보자”
우리는 만수위를 찰랑거리는 청풍호의 윤슬 속으로 첨벙 들어섰다. 배의 선상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하다. 천상유회라는 노래를 출렁거리며 배는 산과 산 사이를 헤집고 달린다.
아! 문득 그와 함께 갔던 뉴질랜드의 남섬 피오르드가 떠올랐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의 안개비를 맞으며 그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여기 어때?” 좋으냐고 묻는 나의 말에
“행복해” 하며 그는 웃었다. 그의 웃음 위로 나의 웃음이 피어났고 결혼 후 오랜만에 합일의 행복에 잠겼었다. 나는 그때의 그 웃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 남 섬의 피오르드가 생각나?” “......”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와 똑같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단양군수를 지낸 이퇴계의 ‘매화시첩’에 나타난 그의 사랑은, 오롯이 아내를 향해 은은하게 잠겨있건만 선장은 꾸며진 어느 기생과의 사랑이야기로 관심을 몰아간다.
배는 어느덧 옥순봉을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아직도 행복한 웃음 속에 잠겨있었다. 옆에 있던 어느 여자분이 ‘보기 좋으세요’ 하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주어 우리의 마음은 한층 더 출렁거렸다.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고 우리는 해 지기 전에 보아야 한다며 상선암 쪽으로 서둘러 길을 잡았다. 중선암에 있는 멋진 단풍나무는 올해도 공작새처럼 푸르고 붉은 깃털을 부채처럼 펼치고 있었다. 매년 인증 숏을 찍는 곳이다. 내가 아는 나무, 내 마음속에 들어와 깊이 살고 있는 나무다.
그곳에서 사인암 쪽으로 들어가면 좁은 강줄기를 끼고 깎아지른 절벽 옆으로 절을 건너다볼 수 있는 풍경이 보인다. 매년보아도 절경이다.
저녁에는 단양시장으로 내려가 마늘순댓국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강변 산책길을 따라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가곡초등학교를 지나 구인사와 온달유적지를 거쳐 보발재를 향했다. 굽이굽이 붉은 단풍 가로수 길을 따라 고갯마루 전망대에 이르니 단풍 취객들의 차가 앞을 막는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만 걸어오면 될 것을 길에다 차를 버리고 단풍을 따라간 것이다.
재를 넘어서니 이번에는 느티나무 노란 단풍들이 바람을 흔든다.
‘노란 손수건’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당신을 환영해요’ 하며 나를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든다. 우리도 푸근하게 서로를 품어주는 마음의 탄력을 잃지 않는다면 빙긋 웃어주는 한 줌의 웃음으로도 기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이야기 속의 사내처럼 나를 기꺼이 받아주는 느티나무 잎들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