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를 걷는 이유

제주올레걷기 7 - 1코스 (시흥리 ~ 광치기해변)

by WonChu

풍경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


여행취향을 간단히 알 수 있는 질문 하나.

'여행 중에 당신은 언제 마음이 가장 편안한가요?'

바로 떠오르는 순간이 나의 여행취향이고,

답이 같은 사람이라면 편안한 동행자가 될 확률이 높다.

말없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동행자.


말미오름. 1코스


나의 경우 그 순간은 '이동시간'이다.

비몽사몽 새벽에 일어나 허덕허덕 터미널의 버스에 올라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털썩 앉으면 주어지는...

해야 할 일도, 할 일도 없는 그 텅빈 시간.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마지막 풍경들,

잠결에 스치는 잊었던 기억과 사람들,

잠깨면 몰려오는 가벼운 한기와 이유 모를 쓸쓸함...


그렇게 풍경의 속도에 따라 흘러가는 생각을 가만히 지켜보는 명상과도 같은 그 시간이...

나는 언제나 그립다.


종달리. 21코스에서 1코스로 넘어가며


풍경 하나, 생각 하나


도보는 이동으로만 채워진 여행이다.

모퉁이를 돌아 다음 모퉁이, 언덕을 넘어 다음 언덕

그 사이의 멈춰진 풍경 속을 온몸으로 느리게 건너간다.


하나의 풍경을 하나의 생각에 빠져

낯선 풍경이 던진 낯선 질문를 받아 안는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듯 걸으며

풍경을 쓸어담는다.

오늘은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어느 날 불쑥 떠올라 꽃이 되어즐 풍경들을.


21코스 지미봉에서 1코스 말미오름으로 가는 길

조금씩 길어지던 내 그림자

키 큰 나무마냥 길 위를 덮을 즈음

느리고 길었던 여정의 종착지에 다다른다.

인증도장을 찍으며 이번 생에 지구 한 귀퉁이를

하나 더 속속들이 보았음을 자축한다.


제대로 된 식사로 수고한 몸을 달래고

한 칸 침대에 누워 점점이 흩어진 기억을 엮어 모양을 그려본다.

하지만 선 하나 긋기도 전에 밀려온 잠의 파도에

기억들 쓸려 사라진다.


꿈 속에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자주 출몰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의 내가 나조차도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겠지.


간밤의 꿈 기억할 수 없게 된 지 오래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오직 오늘만 사는 일꾼처럼

묵묵히 밥을 먹고, 짐을 싸서

어제 멈춘 그 지점으로 찾아가

자고 일어난 세상 속으로 천진난만 무사태평하게 들어간다.


신흥리. 올레 1코스 출발점

자연이 신비로워 지는 순간


버리고, 비우기 위해 걷는다.

최대한 가벼워져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하지만 걷다보면 운이 좋게도 깨달음 같은 것이 툭 떨어질 때가 있다.


일출봉. 멀리 옆에서 위에서

올레 1코스 어디서나 보이는 일출봉.

너무나 익숙해 그 자리 그 모습 당연하게 여겼으나

7시간 3만보, 완주 도장을 찍고 돌아본 순간

일출보다 신비로운 일출봉의 자태를 보았다.


자세히 오래 보아 정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섬을 한 바퀴 돌아 이곳에 다시 돌아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일까?


일출봉. 가까이 옆에서

바다를 향해 마지막으로 분출된 땅의 기운.

섬이 될 뻔하다 부여잡은 육지의 끝자락을 끝내 놓치지 않은 검고 어린 바위.

대자연의 우여곡절이 만들어 낸 거대하고 육중한 난공불락의 성채.


세상 끝까지 갔다 돌아오고 나서야

집 앞의 풀과 돌맹이에 담긴 자연의 위대함을 알아 본 누군가처럼

그것이 세상 어느 해변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로운 풍경임을

돌아돌아 다시 만난 오늘에서야 알아본다.


일출봉. 뒤에서 멀어지며

그 순간 떠오른 깨달음 하나.

자연에 우연은 없다.

아무리 절묘한 풍경도 결국 단순하고 성실한 인과의 산물.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어떤 모양일까?

이 모양에 이르게 된 것도 필시 복잡해보이지만 단순한 인과일 터.

자연풍경을 보듯 있는 그대로의 나를 돌아본다.

헛된 기대와 희망을 제거하고

지난 날의 선택과 행동으로만 이루어진 나의 모습.


광치기해변. 올레의 끝과 새로운 길의 시작

자연을 오래 지켜보고 그 속에 머물 때마다

어김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느낀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순리에 따라 움직이는 안온함을 얻고 싶었으나

오늘의 자연은 단순하면서 냉정하고, 성실하고도 무자비하기만 하다.


형편없는 지난 날의 성적표에 완주도장을 찍었다.

길게 뻗은 내일의 길.

끝없이 때리는 파도르 견디는 검은 바위처럼

단순하고 성실하게 걸어보자고 다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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