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아가멤논>은 기원전 458년 가을. 아테네 대 디오니소스 축제가 한창이던 어느 날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원형극장 너머에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파괴된 아크로폴리스가 여전히 폐허인 채로 남아있었죠.
하지만 아크로폴리스가 다시 멋진 모습을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도 20년, 아테네에는 승리와 영광의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델로스동맹에서 거둬들이는 보호비가 날로 늘어나고 있었고, 각지에서 들여온 노예와 물자가 넘쳐났으며, 시민들을 위해 연일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노작가 아이스킬로스는 들뜬 분위기에 숨어 있는 아테네의 위기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아테네가 승리에 도취되어 전후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들을 외면하고 있음을 우려했습니다. 안으로는 전쟁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는데 무심했고, 밖으로는 여러 폴리스를 동맹국이 아닌 지배와 착취의 상대로만 여겨 보호비를 거둬들이는데 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죠.
아이스킬로스는 트로이전쟁 직후 아르고스 왕국 아가멤논 일가의 이야기를 통해 지난 전쟁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오만함(히브리스)을 경계할 것을 촉구하고자 했습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주인공인 이 작품의 제목이 <아가멤논>인 것은 복수가 아닌 교훈에 방점을 찍고자한 그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1장. 파수병들 - 전쟁의 무료함
트로이전쟁 10년째의 아르고스. 이야기는 두 파수병의 넋두리로 시작(프롤로그)합니다. 그들은 더우나 추우나, 낮이나 밤이나 승전을 알리는 봉화의 불빛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기든 지든 빨리 전쟁이 끝나 지루한 임무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며 웃픈 대사를 주고받습니다.
잔뜩 긴장한 관객의 허를 찌르는 희극적인 시작으로, 비극에 희극적 요소를 가미하는 후기 비극의 경향에 부응하려는 노작가의 분투가 엿보입니다. 주고받는 농담으로 서민들에게 전쟁이란 이긴다고 크게 얻을 것도, 진다고 크게 잃을 것도 없는 고통스런 재난일 뿐임을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수병 :
밤이슬에 젖은 침상에서 꿈을 꾸지 못하는 법,
잠 대신 공포가 찾아와 조용히 눈을 감고 쉬지 못하게 하나이다.
마침내 먼 곳에서 횃불이 벌겋게 일어납니다. 파수병들은 왕비(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빨리 보고 해야겠다며 달려 나갑니다. 이로써 전쟁의 시계는 멈추고, 복수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2장. 코로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 - 복수의 횃불
프롤로그에 이어 코로스가 노래를 부르며 무대 중앙(오케스트라)에 등장하는 장면(파라도스)이 이어집니다. 파라도스, 즉 퍼레이드죠. 이 작품의 코로스는 아르고스의 원로들이 맡고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를 누가 맡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해설자로서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스킬로스가 원로들을 코로스로 선택한 이유는 그들이 지난 세월의 원한관계를 잘 알고 있고, 최근 10년 간 클리타임네스트라의 행적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Agamamnon>. International Greek Drama Festival. 2018
이 작품의 파라도스는 상당히 깁니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노여움을 사게 된 일화, 출항을 위해 아가멤논의 큰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사연을 길게 노래합니다. 코로스가전하는 이피게네이아가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아버지에게 남긴마지막 절규는 무척이나 애절하죠.
원로들 :
‘ 다 잊으셨어요?
만찬을 베푸시던 그 객실에서 저는 자주 노래 불렀죠.
티 없고 순결한 어린 시절
깨끗한 입술로 노래했어요.
아버님의 만수무강을 위해서
당신께 지고한 하늘의 선물이 내려지도록!‘
이윽고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등장하여 제단에 횃불을 붙입니다. 코로스는 그녀에게 제단에 불을 피우는 이유를 묻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이 전쟁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횃불은 전쟁의 끝이 아닌 복수의 시작을 상징하고 있지만, 원로들은 전쟁에 승리한 것이 확실한지 펙트체크에만 매달립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말만 많은 원로들과 냉정하고 은밀하게 복수의 순간을 향해가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긴장관계가 이 작품의 주요한 갈등축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결정적 순간까지 관객들에게 끝까지 속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내내 그녀의 속마음을 궁금해 하며 지켜보다, 복수를 감행하는 순간에서야 그녀가 처음부터 복수를 결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죠. 그녀의 치밀함과 냉정함은 다 아는 이야기를 볼때마다 섬뜩하게 만듭니다. 한없이 천천히 올라가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갑자기 열리며 핏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이 작품의 연출과 관전의 포인트라 할 수 있습니다.
3장. 코로스와 클리타임네스트라 - 악은 악을 낳고, 정의는 정의를 낳는다
에피소드는 인물이 등장하여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입니다. 코로스인 원로들이 애써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중에 아가멤논 부대의 전령이 등장해 승전보를 알립니다. 그러자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다시 등장해 자신을 여자라는 이유로 비아냥거리고 의심하던 코로스를 비웃습니다. 그녀는 원로들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원로들의 기를 꺾어 놓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도권이 넘어 온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은밀하게 복수를 향해 전진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
내 남편에게 이렇게 전하시오, 모두들 학수고대하니 빨리 돌아오시라고.
돌아오시면 아내는 그가 출정할 때와 다름없이 집지키는 개처럼 정절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이 기나긴 세월, 봉인 하나 뜯지 않고 그대로 지켜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고 말씀드리시오.
이어서 코로스의 노래(스타시몬)이 시작됩니다. 코로스는 트로이(프리아모스 왕가)에 내려진 신들의 저주를 노래합니다. 지난번 <결박당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생소한 내용을 길게 읊는 코로스의 노래를 찬찬히 읽다보면 이 작품의 주제를 담은 결정적 대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코로스 (원로들) :
옛날 옛적 전해 오는 말
인간이 행복을 누리면 자손에게 저주를 가져온다고
그래서 영화를 누린 자에게는 그 자손에게 끝없는 재앙이 온다하네.
허나 나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사악한 행위는 행복과 부가 아닌 불경스런 행위,
악은 악을 낳듯이, 정의가 깃들인 집안은 정의를 낳느니라.
돈이 많은 것, 권력을 쥐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얻고 쓰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악행이 문제라는 냉정한 통찰도 인상 깊지만, 돈과 권력 뿐 아니라 악과 정의도 대를 이어 내려간다는 교훈이야말로 통쾌하고도 서늘합니다. 악행으로 얻은 부과 권력을 물려받아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악행을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음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근래 쏟아져 나온 갑질 사태에 대한 인류 최고의 원인진단입니다.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The Sacrifice of Iphigenia (1633)> François Perrier. Musée des beaux-arts de Dijon
4장. 아가멤논 - 왕의 귀환
전쟁에서 승리한 아가멤논이 드디어 전차를 타고 등장합니다. 그는 전리품으로 트로이아의 공주, 카산드라를 데리고 옴으로써 복수당해야 할 죄목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아가멤논의 전차 앞에서 아르고스의 원로들이 환영의 노래를 길게 부릅니다. 원로들은 트로이원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비굴해보일 정도로 반성하는 한편 아가멤논의 승리를 오글거릴 정도로 찬양합니다.
코로스 (원로들) :
우리의 대왕이시여! 헬레네 때문에 그리스 인에게 출전하라고 명령하셨을 때만해도 솔직하게 말씀드립니
다만 저는 오해하고 있었나이다. 제 생각에는 대왕께서 저희를 경멸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다른 사람들을 마구 죽음의 길로 몰아넣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승리한 이 마당에
역시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견제 세력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것은 아가멤논이 이 전쟁을 통해 노렸던 마지막 목표가 성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야흐로 아가멤논의 황금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아가멤논이 이에 화답하듯 일장 연설을 합니다.
아가멤논 :
그대들이 지금 이야기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는 나도 고맙게 생각하오. 다른 사람이 영광의 절정에
있을 때 시기하지 않고 사랑으로써 칭송할 줄 아는 사람이란 극히 드문 법이니까. 시기에 사로잡힌
가슴속에는 독기가 스며 그 심장을 더욱 무겁게 하는 법이니 그 고통 속에서 더욱 괴로워하여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탄식하게 마련이오. 이는 허황된 소리가 아니라 확실한 경험에서 하는 말이요.
‘확실한 경험에서 하는 말’이라는 대사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시기의 독기가 심장에 스며 불운을 불러온 경험은 바로 자신과 아킬레우스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일리아드>에서 자신의 전리품인 트로이 신관의 딸 크리세이스를 돌려주는 대신 아킬레우스의 전리품 브리세이스를 빼앗습니다. 이에 화가 난 아킬레우스는 전선에서 빠지고, 그리스연합군은 패전 직전까지 몰리게 되죠.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와의 갈등을 시기심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함으로써, 지난 전쟁에서의 과오를 자신의 오만과 탐욕이 아닌 아킬레우스의 시기심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기심으로 따지면 아킬레우스에 대한 그의 시기심이 훨씬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의 대사를 보면 그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아가멤논이 전에 없이 겸손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로들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경험의 교훈을 되새기고, 귀향길에서 풍랑을 만나 실종된 오디세우스를 걱정하고, 또 연설 끝에서 무엇보다 먼저 신들에게 감사의 경배를 드려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짧고도 아름다운 겸손한 삶은 여기까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회유작전이 재개됩니다.
남자들이 서로를 정신없이 치켜 주며 자축하고 있을 무렵,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등장해 아가멤논의 허영심을 부추기기 위해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비단 카펫을 깔아 줍니다. 이에 아가멤논은 신들의 질투를 두려워하며 한사코 이를 거절하죠.
아가멤논 :
이러한 비단이나 찬란한 의식이 아니더라도 내 명예에는 손상이 없소.
영광스런 시간에도 분별을 지키는 것이 하늘이 주시는 최선의 선물이오.
저 격언을 생각해 보구려.
‘행복한 일생을 평화로운 죽음으로 장식하는 자만이 축복받은 자니라.’
마음 편히 내 운명을 걸어가고 싶소.
이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며 막무가내로 비단 천을 밟고 가라고 권합니다. 자신의 사랑과 충성심을 증명해 긴장을 풀도록 하는 한편, 원로들로부터 그를 고립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겸손 떨기가 버거워진 아가멤논은 그녀의 권유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아내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던 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가멤논은 궁궐 안으로 향하며 카산드라를 잘 보살펴 주라는 말을 슬쩍 던져놓죠. 이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카산드라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해 일언반구의 불평도 하지 않고 아가멤논을 궁 안으로 안내합니다. 그녀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티끌만큼의 사랑도 남아 있지 않으며, 오로지 분노와 복수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장. 카산드라 - 올 것은 오고야 만다
아가멤논이 궁 안으로 들어가자 코로스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노래합니다. 그들은 아가멤논의 우유부단한 처신에 줄을 어떻게 타야할지 갈팡질팡 합니다. 그 와중에 남편을 욕실에 밀어 넣고 나온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카산드라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합니다. 이때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본 카산드라가 공포에 휩싸입니다. 예지력을 가진 그녀에게 아가멤논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의 예지력은 아폴론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반한 아폴론은 환심을 사려고 앞날을 내다보는 능력을 선물로 주었고, 그럼에도 불구 사랑을 거절당하자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먼저 약을 주고 나중에 병을 준 결과 그녀는 트로이전쟁의 중요한 고비마다 앞날을 예견하고 조국의 살길을 애타게 호소했지만, 조국은 언제나 죽을 길로만 갔더랬죠.
Cassandra in <Agamnon>. International Greek Drama Festival. 2018
그녀는 이제 궁궐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을 알았기에, 공포에 질려 코로스(원로들)에게 아가멤논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언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역시나 원로들은 반쯤 미쳐 보이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카산드라 : 아가멤논의 최후를 보시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믿건 안 믿건 상관없어요. 올 것은 오고야 마니까.
코로스장 : 이봐, 그런 불길한 말은 삼가요.
카산드라 : 하지만 아폴론은 구원의 신으로서 제 말에 임하시는 것은 아니에요.
코로스장 : 하긴 오신다고 해도,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소.
그렇게 비밀을 털어 놓은 카산드라는 궁 안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갑니다.
6장. 아가멤논의 죽음 - 주저하는 자와 행동하는 자
<Murder of Agamemnon>(1817) Pierre-Narcisse Guérin. Louvre
카산드라가 퇴장하자마자 관객에게 총을 쏘듯 궁 안에서 아가멤논의 비명이 들려옵니다. 원로들은 비명 소리를 듣고는 코로스1부터 11까지 각자의 의견을 쏟아내며 우왕좌왕 합니다. 원로들은 각자 옳은 소리만 할 뿐, 아무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코로스2 : 내 생각에는 지금 당장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아직도 피가 묻어 있는 칼을 저 흉악한 살인의 증거로 삼아야지.
코로스4 : 이건 분명 포악한 전제정치를 하려는 시초요.
코로스5 : 이렇게 머뭇거리니까 그렇소.
주저하는 자들의 명예를 짓밟고 그자들은 쉬지 않고 악행을 감행하는 것이오.
코로스6 : 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행동하는 자는 자신의 방법을 알고 있을 테니까.
코로스7 : 내 생각도 그래. 한 목숨 끊긴 이상 다시 살릴 수도 없고.
살인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비극의 금기사항. 아이스킬로스는 코로스 11명이 각자 짧은 대사를 정신없이 내뱉게 하는 파격적인 기법으로 긴박한 전개를 이어나가는 재치를 발휘합니다.
원로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온몸이 피를 뒤집어 쓴 클리타임네스라가 문을 열고나옵니다. 열린 문 안에는 이미 아가멤논과 카산드라가 죽은 채 누워 있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피가 흐르는 도끼를 손에 든 채 내내 감추어 온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Clytemnestra After the murder (1882)> John Collier. Guildhall Art Gallery. London
클리타임네스트라 :
그때 칼자국 구멍에서 시뻘건 피를 내 몸에 내뿜었지만, 그러나 나는 기뻤어요.
하늘이 내려 주는 자비로운 비를 받아 기뻐하는 통통한 껍질 속의 보리알처럼 말이에요.
참혹한 범행을 태연하게 고백하는 그녀를 향해 원로들은 거품을 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원로들 또한 죄악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그 죄악은 바로 침묵의 죄.
클리타임네스트라 :
이 사람은 어여쁜 딸을 속죄양으로 바쳤지. 내 배에 진통을 일으킨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딸을
몰아치는 트라키아의 태풍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바쳤을 때, 당신들은 잠자코 있었어.
당신들은 이 사람을 이 나라에서 추방해야 했어요. 신을 모독한 죄로.
그런데도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엄격한 재판관이 되겠다는 거죠.
그렇지만 그런 위협은 나도 각오한 바예요. 당신이 이기거든 나를 지배해요.
권력에 굴복해 온 원로들에게 자신을 심판할 자격이 없음을 질타하는 대목이 또 한 번 통쾌함을 선사하는 가운데, 궁지에 몰린 원로들은 악독한 여인, 독초, 악마, 배신자, 시체 옆의 까마귀... 등 갖은 비난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그들의 절규와 반항 위로 지난날의 비굴함이 겹쳐질 뿐입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결론 없는 설전을 벌이는 사이, 그녀와 범행을 공모해 온 아이기스토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정부, 즉 내연남입니다. 그는 아가멤논과 사촌지간이자 가문의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는 왕권을 두고 다투었는데,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는 왕이 되고 나서 아이기스토스의 형을 죽여 요리한 후 그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동생인 티에스테스에게 먹인 적이 있었죠. 이것이 아가멤논이 물려받은 부와 권력에 묻어 있는 죄였습니다.
아이기스토스는 원로들에게 자신의 가문과 아가멤논 가문 간의 오랜 원한을 토로하며 범행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의 설전에서 완패를 당한 원로들은 공격의 화살을 아이기스토스로 돌립니다. 자신의 손이 아닌 여자의 손으로 복수를 하게 만든 그의 남자답지 못한 비겁함을 비난하며 논쟁은 진흙탕이 되어 버리고, 급기야 그들은 결투분위기로 치닫습니다. 그러자 이 꼴을 보다 못한 클리타임네스트라가 특유의 냉정함으로 난장판을 단번에 정리합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 :
비참한 건 이만하면 됐어요. 이 이상 피에 젖어서는 안 돼요.
그리고 노인장들, 어서 거처로 돌아들 가시지. 혼나기 전에.
지금가지 겪은 재난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아요?
신령의 매운 채찍에 맞을 만큼 맞았으니까요. 이것이 여자의 생각이에요.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몰라도.
원로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는 정면으로 반박을 하지 못하고, 겨우 아이기스토스에게 “지금 뻐겨두는 게 좋아. 옆에 암탉이 있으니까!”라는 다분히 감정적인 경고를 내뱉습니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며 궁 안으로 들어가고, 원로들이 화난 표정으로 퇴장(엑소도스)합니다.
무대 위에 남아 있는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시체가 전쟁의 상처와 오만의 끝을 보여주는 가운데... 비극 <아가멤논>은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무대 뒤에는 그 자식들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복수의 절정으로 치닫는 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을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