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배경신화 편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트로이전쟁 직후 아가멤논 왕가에서 벌어지는 복수극입니다. ‘오레스테이아’라는 말은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말로 ‘오레스테스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오레스테스는 아가멤논의 아들로만 여기지만, 미케네문명권의 아르고스 일대에서는 시조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마도 트로이 전쟁기 아르고스 일대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한 성군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가멤논 신화와 오레스테이아는 그 혼란과 극복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내용을 요약하면...
1편 <아가멤논>에서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가멤논 왕을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라가 살해하고, 2편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청년이 된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여동생 엘렉트라와 함께 친어머니와 그의 정부를 살해하고, 3편 <자비로운 여신들>에서는 공황상태의 오레스테스가 신들의 재판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생소한 이름이 많고, 일견 막장복수극 같이 보이지만, 이 작품의 의미와 영향은 매우 심대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작품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그 이름과 의미를 최선을 다해 쉽고 흥미롭게 소개해 보려 합니다.
트로이전쟁 - 역사가 된 신화
먼저 이 작품의 배경인 트로이전쟁입니다. 트로이전쟁은 기원전 13세기 경 그리스연합군(아카이아 군대)과 트로이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오랫동안 신화와 전설로 여겨져 오다 1871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레이만’이 터키 히사를리크에서 트로이유적을 발굴해 냄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죠.
트로이는 지금의 터키 북서부 해안에 있던 무역도시였습니다.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길목의 항구도시로써 막대한 거래세와 통행세를 거둬들이며 황금도시를 건설했죠. 신화에는 이 전쟁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해가는 바람에, 혹은 헬레네와 눈이 맞아 달아나는 바람에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합리적으로 추론해보면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그리스의 왕국들이 연합하여 트로이 침공을 감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미케네문명기였습니다. 교과서에 크레타문명에 이어 나오는 그 미케네문명이죠. 미케네문명은 그리스 서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었던 고대문명으로 먼 훗날 그 자리에 스파르타가 자리하게 됩니다. 미케네문명을 신화에서 역사로 불러낸 것도 ‘슐레이만’이었는데요, 그는 트로이 유적을 발굴을 마치지자 마자 미케네로 달려가 여러 무덤과 왕궁 터를 찾아냈습니다. 당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특별한 것은 황금가면이었고, 그는 이것을 ‘아가멤논의 가면’이라 불렀습니다.
아가멤논 - 미케네문명의 절대강자
과학적 분석에 의해 이 가면은 기원전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실제주인은 아가멤논보다 300년 정도 선대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여전히 ‘아가멤논의 가면’이라 부릅니다. 미케네문명의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가멤논이기 때문입니다. 아가멤논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나 그것을 영화화한 <트로이>에서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그는 탐욕스럽고 다혈질적인 원정대의 총사령관이었죠.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적국의 공주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핵심 전력인 아킬레우스를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그는 트로이전쟁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주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멤논에게는 메넬라오스라는 동생이 있었고, 동생의 아내가 바로 파리스가 납치해 간 헬레네였습니다.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이었습니다. 메넬라오스는 아르고스의 왕인 형을 찾아가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아가멤논은 그리스전역의 영웅들을 끌어 모아 트로이로 쳐들어갑니다. 참고로 아르고스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의 전통적인 강국으로 당시엔 형제가 나눠 다스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나 먼 훗날에는 애증의 이웃나라 관계가 됩니다.
신화는 헬레네에게 청혼했던 영웅들이 누가 남편이 되던 그녀를 함께 보호하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가했다고 되어 있지만, 정황상 납득이 잘 가지 않는 구석이 많습니다. 합리적으로 유추해보면, 지중해무역을 장악한 트로이의 권세가 그리스본토를 건너 미케네지역까지 미치자 그리스의 맹주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아가멤논이 도발을 결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일원이 된 영웅들은 존재감 없는 군소 왕국의 왕이나 왕자들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지역의 왕족이 아가멤논의 호출을 거부하지 못하고 참전했다는 사실은 당시 미케네 왕국의 위상과 권세가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반증한다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공하기 전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한 것과 같은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아킬레우스가 여장을 하고 숨어있었다는 신화에서는 걸출한 왕자를 잃지 않으려는 약소국의 비애가 읽히고, 그를 찾아가 잔꾀를 부려 설득해 냈다는 오디세우스 신화에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왕국을 키워보려는 약소국의 분투가 보인다 하겠습니다.
클리타임네스라와 이피게네이아 - 어벤져스로 되살아난 희생
영웅들은 트로이에서 10년을 싸웠습니다. 잘났던 못났던, 잘했던 못했던 전쟁의 주인 아가멤논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에게 살해당합니다.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남편에 대한 클리타임네스라의 원한은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아가멤논의 호출을 받은 그리스연합군의 함대가 집결한 곳은 아울리스. 우리로 치면 원산항 정도 되는 군항이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연합군의 출항을 막은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반대로 불어서 문제였다는 설도 있고, 바람이 불지 않아서 문제였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날씨 때문에 출정이 계속 연기되는 상황은 기강과 사기에 치명적인 악재였다 할 수 있습니다. 신화에서는 아가멤논이 사냥을 나갔다가 아르테미스 여신의 사슴을 화살로 쏘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 보면 뭐든 안 되면 무슨 말이라도 만들어 대장 탓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전쟁에 임하는 그의 태도가 실제로 불성실했을 수도 있지만요. 아가멤논 입장에서 이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답답하던 차에 잠깐 사냥을 나갔던 것을 빌미로 누군가 가짜뉴스를 퍼뜨린 형국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급기야 그는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맹인 예언자 ‘칼카스’를 불러 점을 봅니다. 그러자 예언자는 “아르테미스 여신은 아가멤논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제물로 바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자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불러 모은 각지의 군사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공표된 이 예언으로 아가멤논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군사를 장악하고 전쟁을 감행하기 위해서는 예언에 상응하는 어떤 액션을 보여주어야만 상황. 하지만 아무리 짜낸다한들 '자식의 희생'을 대체할 만한 대안이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가멤논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큰 딸 ‘이피게네이아’, 장남 ‘오레스테스’, 막내 딸 ‘엘렉트라’. 아가멤논은 그중에서 큰 딸을 가장 어여삐 여겼습니다.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간난 아기였던 반면, 10대인 이피게네이아는 말이 통하는 것은 물론 누가 봐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였죠. 아가멤논은 결국 아내에게 이피게네이아를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기로 했다며 모녀를 아울리스로 부른 다음, 큰 딸을 제물로 바쳐버립니다. 그러자 바람은 동쪽으로 불기시작 했고, 아가멤논은 모든 불만을 잠재우고 원정을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 같죠?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화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2018)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타노스는 소울스톤을 지키고 있는 레드스컬에게 소울스톤을 얻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만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자 타노스는 수양딸 가모라를 가차없이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죠. 이 외에도 마블히어로 영화에는 그리스신화와 비극을 인용한 대목이 수없이 많은데요,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능력껏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속아 딸을 잃은 클리타임네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슬픔과 분노에 찬 그녀는 전쟁이 벌어지는 10년 간 악에 바친 세월을 보냅니다. 남편이 차라리 전쟁에서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한편, 왕권다툼으로 인해 남편과 원수가 된 사촌동생 ‘아이기스토스’와 정을 통하고 그와 권력을 나눠가집니다. 그러던 차에 아가멤논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게 되었으니... 남편을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이것이 그녀가 남편을 살해하게 된 배경스토리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3부작의 1편 <아가멤논>에서 남편의 피를 뒤집어씀으로써 그리스비극의 3대 악녀가 됩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잔혹한 전쟁후일담
아이스킬로스는 전쟁 중에 벌인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아가멤논과 그 가족들의 비극을 집중 조명했습니다. 이 드라마를 막장복수극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행동에는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타공인 복수극의 효시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잔혹한 전쟁후일담이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비극에는 전쟁담보다 전쟁후일담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무대에서 전투를 재현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할 수 있는데, 그리스비극은 무대 위에서 살인장면을 보여 주는 것을 금기시 했기에 전쟁담을 공연화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죠.
하지만 후일담이 많았던 진짜 이유는 당시가 페르시아 전쟁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13세기의 트로이전쟁과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전쟁은 둘 다 동서의 세계가 충돌하여 그리스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전쟁에 승리해 황금기를 맞은 아테네라고 전쟁후유증이 없었을 리는 없을 터. 특히 페르시아전쟁은 그리스 땅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기에 그 상흔이 더 컸었죠. 하지만 영광의 승리를 자축하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개개인의 슬픔과 고통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페르시아전쟁 대신 그 옛날 트로이전쟁에 빗대어, 그것도 지역감정이 많은 스파르타의 선조들에 빗대어 승리한 전쟁이 남긴 비극을 맘껏 표현했고, 원형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은 공연을 보며 맘껏 눈물을 흘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끝나면, 세상에는 파괴된 영혼들만 남겨집니다. 전쟁은 그것을 시작하고 끝내기보다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괴물이 된 가해자와 폐허가 된 피해자. 또는 폐허가 된 가해자와 괴물이 된 피해자... 사람들은 처치 곤란한 영혼을 안고 오랜 시간 각자의 전쟁을 이어갑니다. 과연 우리가 겪어 왔고, 겪고 있는 전쟁의 후유증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보다 덜 비극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상처와 아픔이 다 사라지는 그날에서야 우리는 진정으로 전쟁이 끝났다 말할 수 있을 것이기에...
65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전쟁이 이번엔 반드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펼쳐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