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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Chu Apr 05. 2022

거대한 시간의 흔적들

평화누리길 10코스 고랑포길

누리길의 운명


평화누리길은 시한부의 길이다. 만들어질 때부터 평화의 시대가 오면 비무장지대에 그 이름을 내어주고 그저 시골 둘레길이 되어 버릴 운명을 타고났다. 2018년 평창올림픽 이후 갑작스레 찾아온 평화의 무드 속에 떠오른 질문 하나 때문에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곧 열릴 평화의 문을 지나 대륙으로 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게 민통선 아래 동서로 이어진 둘레길인 평화누리길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남북은 평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나는 지난 역사를 온몸에 담아 북녘과 대륙으로 달려가기 위해 서둘러 누리길에 올랐다.   



그후 3년, 남북미가 문고리를 잡고 여네마네 실랑이를 하는 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끔씩 이 길을 걸었다. 그런데 아뿔사... 일순간 돌연한 광풍이 불었고, 평화의 문이 쿵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양편에서 떼어냈던 자물쇠를 덕지덕지 다시 달게 생긴 것이... 지난 평화의 시간이 벌써부터 아득하기만 하다. 그렇게 대륙으로 달려나가리라던 나의 부푼 가슴은 차디찬 강물을 만난 용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이 되어버렸다.


들에는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었다. 창 밖을 멍하니 보다 가방을 쌌다. 무작정 걷기 위해. 무식하게 몸을 혹사하기 위해. 찢어진 마음의 지도를 어떻게든 아어 붙여보기 위해...  


누구의 탓인가


오늘의 출발지. 가야할 곳...은 언제나 멀다.

10코스는 장남교-사미천 징검다리-학곡리고인돌- 적석총- 숭의전지 까지 16km의 길이다. 경의중앙선을 타고가는 내내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탓인가 생각했다. 쪽도 쪽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마냥 순진하게만 생각한 나의 탓인가? 아니면 같은 땅에 살지만 나와는 다른 꿈을 꾸고 사는 야속한 사람들 탓인가? 지하철 모든 사람의 머리 위로 1과 2가 떠다녔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고, 세번째 가는 문산역은 가도가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9코스 종착점 직전인 황포돛배나루에서 걷기를 멈추고 빨간 이층버스를 타고 문산역으로 돌아왔었다. 오늘은 왔던 대로 가서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한 시간마다 오는 버스시간를 확인하고 브레드킹 제과에서 빵을 사고, 김밥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시간 맞춰 문산역 앞 버스정류장으로 갔으나... 버스는 4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출발지에서 만난 참호. 역사의 현장으로 되살아날지도 모를 유적.

시간표를 자세히 보니 버스번호 옆에 (휴일, 주말)이라 써 있다. 오늘은 금요일. 휴일,주말에만 운행한다는 뜻? 다른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이것은 누구 탓인가. 하던대로 하면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한 내탓인가? (휴일, 주말) 표시에 더해 "평일은 운행하지 않습니다" 라는 짧은 말 한마디 넣는 걸 아낀 군청 혹은 버스회사 탓인가?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두 번에 걸쳐 걸은 길을 관통해 택시가 달렸다. 30분 16,000원 어치의 길이었다.


황포돛배에서 내려 9코스 남은 길을 채우기 시작, 장남교를 건너 10코스 관문에서 스템프를 찍었다. 여기는 도장이 네모군... 하며 찍고보니 경기둘레길 도장이었다.  고이 채워오던 스탬프의 짝이 10번째에서 틀어졌다. 한 번 찍은 도장은 무를 수 없다. 엉뚱한 도장을 골라잡은 내 손가락을 자르고 싶었다.  


마을을 만나 무작정 걷다보니 평화누리길 리본이 보이지 않았다. 직감으로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어야 했던 것 같았다. 확신은 없지만 마을을 가로지르기 위해 농가의 후미진 뒷길을 지나 인삼밭 울타리를 넘어 논길을 건너갔다. 확신없이 헤매는 길은 마을도 정글이고, 짖는 개들도 맹수였다. 다행이 반대편으로 나가는 길에서 리본을 찾았다. 운이 좋았다. 우리의 평화도 운 좋게 피 흘리지 않고 다시 제 길을 찾게 될까?


정글같던 마을을 빠져나오며...

고개를 넘어 사미천 돌다리를 만났다. 거리상으로는 이제 막 시작한거나 마찬가지인데 마음은 이미 지쳐 있다. 돌다리가 물을 반으로 가르자 고요히 흐르던 물이 요동을 쳤다. 가만히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의 응어리가 살짝 풀리는 기분이었다. 얼마 못 가 잔잔해지며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풍경이 보기 좋았다. 


계단 앞 이정표에 주의. 올라가라는 표시가 아니고 오른쪽 천변길로 가라는 표시다.  게단을 오르면 한 시간을 돌아가야 한다.


이정표에 따라 계단을 올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길은 1시간 가까이 돌아가는 길이었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하천을 따라 옆으로 돌아 또 하나의 돌다리를 건너면 가까울 길을, 긴 뚝방길을 따라 올라가 다리를 건너 다시 긴 뚝방길을 되돌아 왔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멀리 돌아가며 시간보다 소중한 체력을 소진했다. 초반부터 실패의 연속이다. 한 두번 실수는 실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반복된 실수는 실수가 아니다. 누구 탓을 하고 말것도 없이 겸허하게 내가 바보임을 받아들일 수 밖에. 그래도 바보라는 걸 인정할 줄 아는 바보이니 그냥 바보보다는 나은 걸까? 아니면 각도만 살짝 틀어 몰래 옆길을 가리키던 누리길 이정표를 끝까지 탓하며 똑똑한 바보로 사는 것이 나은 걸까?



돌아가는 둑방길 위에 마르지 않은 도로 위를 건너간 고라니의 발자국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고라니가 남긴 범행의 흔적. 한 번 남긴 흔적은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기억될 수 있다. 그리고 발각된 범행은 당장 처벌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호되게 헤매고 나서야 임진강변 갈대 숲길로 들어섰다. 이제 강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8코스 반구정부터 멀리 바라보기만 했던 임진강을 드디어 옆에 두고 걷는다. 파주누리길과 연천누리길의 가장 큰 차이. 바싹 마른 갈대숲과 연한 연두빛 움을 틔우기 시작한 버드나무. 쌍을 지어 앞서 날아가는 나비들, 비탈에 붙어 나물을 캐는 아주머니들... 누리길에서 만나는 세번째 봄이었다. 몇 번의 봄을 더 지나야 평화누리길은 그 운명을 다하게 될까?           


거대한 시간의 흔적들

반만년 전 시간의 흔적

시간과 체력을 허비한 채 조용한 동네를 지나다 갑자기 고인돌을 만났다. 집과 집 사이, 집 한 채 자리 평평한 잔디 밭 안쪽 깊숙히 고인돌이 숨어 있었다. 내 마음과 같이 구멍이 숭숭 난 검고 무거운, 직경 2.7미터의 화산암이 작은 받침돌 위에 이름 그대로 고여 있었다. 다른 고인돌에 비해서는 안정적인 모양이지만, 작은 받침돌 위에 올려진 거대한 돌이 어김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위태로운 긴장감이 단순한 형태를 따라 피처럼 흐르며 고인돌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위태로움을 견디며 앞으로 걸어가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어차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위태롭고. 긴장이 사라지는 순간 생명은 소멸되는 법. 고인돌은 길게는 5천년, 짧게는 3천년 동안 이 긴장을 버텨오고 있다. 고인돌처럼 버텨야 한다. 앞으로 가야한다. 버텨야 살고, 살아 있는 한 앞으로 가야 한다. 그런 마음자세를 유지해야 최소한 제자리라도 유지할 수 있다... 전세게 남아 있는 6만 여개의 고인돌 중 4만 여개가 한반도에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

   

기도란 결국 내 마음 속에 비친 하늘의 뜻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학곡리 고인돌이 있는 마을에서는 지금도 나쁜 일이 생기면 고인돌 앞에서 굿을 한다고 한다. 이 고인돌이 따로 조성된 고인돌공원으로 옮겨지지 않고 여기에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은 마을 사람들이 고인돌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이 거대한 돌에는 팽팽한 긴장에 더해 5000년의 기도가 담겨 있다.


기도란 하느님의 대화라고 했던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단지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하느님에게 끊임없이 묻고 스스로 대답을 찾는 행위가 기도라는 얘기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이 뭔가를 간절히 바라다보면 자연스레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생각하고, 스스로 뉘우치며 다짐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고로 나의 죄를 덮고자 하는 기도, 남을 저주하는 기도는 사악한 자기기만이지 기도가 아니다. 기도를 빙자해 자기기만을 부추길 때 종교는 사이비가 되고, 아편이 되고, 광증이 된다. 세상의 모든 기도가 남이 아닌 자신을 향하기를, 죄가 덮히기를 바라는 시간이 아니라 뉘우침과 깨달음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순진한 기대에 불과 터. 오늘은 못믿을 인간의 기도가 아닌 고인돌이 견뎌낸 반만년의 위태로움에 더 마음이 간다.  


청동기 부족민들이 남긴 흔적에서 생각지 못한 위안을 얻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먼 미래의 후손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는? 아파트 거주지의 시멘트 무덤 말고 무슨 흔적이 남을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연천 학곡리 적석총

고인돌의 감동을 되새기며 마을을 빠져나와 도로로 접어들 무렵, 갑자기 또 하나의 무덤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연천학곡리적석총. 백제 건국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지 무덤이다. 임진강가 구릉을 평평하게 깍아내 만든 터에 10여 미터 길이로 돌들이 쌓여 있다. 원래 25미터 규모로 추정되며 4개의 요곽에서 다수의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둥글고 큰 강돌들을 모아 만든 길고 부드러운 무덤. 긴장을 품은 고인돌과 달리 바닥에 누워 영원한 휴식 중인 사람의 모양과도 같고, 강건너 길게 누운 산자락의 모양과도 닮았다. 억세게 살아야 했던 고조선인과 이 국경지대에서조차 농사를 지으며 안온한 삶을 추구했던 백제인의 차이가 그대로 느껴졌다. 온기가 풍겨나오는 돌무덤 옆에 서서 오래된 흔적을 한 권의 책을 잃듯 연구하는 고고학자가 되어도 좋을 뻔 했다는 생각을 잠시 하던 중...



돌무덤 너머로 지금까지 들은 적,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장례식 풍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강변에 흰옷을 입은 남녀노소의 주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고개를 숙인 채 각자의 강돌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품고 있는 죽은 자와의 추억에 어울리는 모양의 돌을 찾고 있었다. 기운이 허락하는 크기의 돌을 양손으로 받쳐 든 그들이 무덤을 향해 말없이 걸어왔다. 그리고는 돌을 들어내고 관을 묻은 무덤 주변에 동그랗게 둘러서기 시작했다.


고인과 가까운 사람들부터 관 위에 천천히 각자의 마음이 담긴 돌을 올려놓는다. 돌을 하나씩 내려놓는 동안 마고할미는 먼저 간 조상들을 향해 영혼을 잘 맞아달라 축원을 한다. 눈물을 닮은 강돌들이 모여 작고 부드러운 산이 된다. 이윽고 모두 빈 손이 되자 한 마음으로 죽은 영혼을 위해 축원을 한다. 그리고는 오래된 추억과 기원을 뒤로 하고 다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다. 


그렇게 들은 적,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장례식이 끝났다. 그후 2천 년 동안 절반의 강돌들이 강물에 쓸려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오래된 눈물 몇 개 다시 강돌이 되어 강가 어딘가에 뒹굴고 있었다. 

  


반만년의 흔적 고인돌, 2천년의 흔적 적석총을 지나니 길이 다시 임진강으로 향했다. 이번엔 강 건너가 온통 적벽이었다. 신생대 4기, 물경 50-60만년 전 시간의 흔적이었다. 9코스에서는 배를 타야만 볼 수 있었던 적벽을 한 시간 내내 마주하고 걷는 길. 고대의 장대한 속살, 조용히 흐르는 강물, 그리고 한 줄로 이어진 아무도 없는 길...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대륙을 건너 한반도까지 온 조상들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걷는다. 시간여행의 절정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 그동안 이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감회에 휩싸여 꿈을 꾸듯 걷고 또 걸었다.


임진강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더 많은 비경과 유적을 품고 있다고 한다. 상류에 비한다면 이곳은 시작에 불과한 풍경일 테지만, 도보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풍경에 대한 다른 감회가 있다. 반구정 철조망 너머로 처음 만난 임진강. 그후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나무 사이, 언덕 너머로만 볼 수 있었던 물줄기. 그렇게 아주 조금씩 깊은 곳을 향해 걸어 온 끝에 드디어 풍경 속으로, 오래된 시간 속으로 들어온 곳이 여기인 것이니... 만나 온 모든 풍경, 앞으로 만날 모든 풍경보다 반갑고 특별할 수 밖에.   

 


뒷산으로 해가 저물며 적벽에 산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할 즈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10코스 종착지 숭의전까지는 아직도 두 시간은 더 가야하는데 무정하게 해가 저물고 있었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딱 내가 헤맨 만큼, 무덤 가에서 서성인 만큼 소진되었을 뿐이다.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긴 틀렸다. 가다보면 숙소가 나오겠지 하는 순진한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으나, 산을 깎아 만든 아무것도 없는 오르막 도로 한 중간에서 완전한 어둠을 만났다. 고개를 넘자마자 마을 초입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를 검색해 전화를 걸었고, 10여 분 뒤 어둠 속에서 자동차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무작정 나선 길, 길을 헤맨 덕에 무식하게 몸을 혹사하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마음의 지도 한켠은 여전히 무너져 있다. 걷는 내내 아주 오래 전 이 땅에 살았던 그분들의 위태로운 하루하루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 애썼다. 거대한 시간의 흔적들 앞에서 잠시나마 느낀 위로와 흥분은 힘들었던 시절의 특별한 마음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역시 걷기를 잘했다. 멋진 흔적을 남겨 준 대자연과 이 땅의 조상님들께 감사를!   



P.S

숙소에 들어가서 든 한 가지 의문. 10코스의 이름은 고랑포길인데 고랑포는 과연 어디 있는 것인가? 혹시 내가 모르고 지나친 것일까?


검색을 해 보니 고랑포는 10코스 시작점인 장남교에서 누리길 코스를 벗어나 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있는 포구였다. 대충만 봐도 매우 흥미로운 곳이라 많이 돌아가더라도 누리길 코스에 넣었어야 했지 싶다. 고랑포는 분단 이전까지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을 정도로 물동량이 많았다고 한다. 경관이 좋은 요충지라 고려시대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이야기가 많아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근처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유적들도 있다.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구려 유적인 호로고루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 그것. 특히 호로고루는 11코스의 고구려 유적인 당포성과 고성산보루의 시작점이자 거점이니 꼭 보고 갔어야 할 중요한 유적인데...  


고랑포가 이 구역의 대표적인 명소이나 누리길 코스에 넣자니 너무 돌아가야할 상황, 가보진 않더라도 고랑포를 알고나 가라는 의도로 담당자가 10코스에 그 이름을 붙인 것 같긴 한데... 코스를 고랑포로 돌리거나 아니면 다른 이름을 붙이거나 확실하게 선택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궁금한 곳이라 혹시 10코스를 다시 걷게 된다면 고랑포와 호로고루로 돌아가는 나만의 10코스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 하여금 고랑포를 알아보게 하고, 다시 그곳에 갈 이유를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담당자의 네이밍이 일단은 제대로 먹힌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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