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누리길 11코스(임진절벽 길)은 역사유적과 자연경관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다. 연천에 이르러 모습을 드러낸 임진강 절벽이 줄곧 이어지는 가운데, 비경을 배경으로 한 의미심장한 역사유적들 - 숭의전(고려의 종묘), 당포성(고구려의 평성), 유엔군화장장, 고성산보루(고구려의 참호들) - 이 연달아 나타나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게 만든다. 단언컨대 경기도 12개의 평화누리길 중 가장 순도 높고 뜨거운, 최고의 구간이다.
평화누리길이라는 드라마
이곳에서 평화누리길의 절정을 맛보았으므로, 경기도의 평화누리길 12코스 전체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하나의 드라마에 비유해 정리해보자면... 강렬한 도입에 성공한 김포(1-3코스), 한강을 타고 흥미로운 전개를 시작한 행주산성(4코스), 맥이 빠져 그만 볼까 싶은 일산(5-6코스), 삭막함과 난개발로 실망감의 바닥을 치게 만드는 7코스를 딛고, 온화한 풍경으로 안정적인 전개에 안착하는 파주(8-9코스), 그리고 마침내 임진강의 비경을 타고 긴장감을 폭발시키는 연천(10-11코스)로 요약 할 수 있다.
임진강과의 첫 만남, 반구정
연천의 마지막인 12코스가 옥녀봉에서의 전망과 단절된 철로의 대단원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길은 평화누리길 시즌2라 할 강원도 평화누리길로 이어질 예정이다. 강원도는 경기도보다 훨씬 강한 군사적 긴장과 드라마틱한 자연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직 누리길 전체가 완성되지 않은 채 중간중간 끊어져 있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기 어려운 형국. 이제 슬슬 블록버스터 급의 시즌2(철원-고성)를 위해 백패킹을 준비해 볼까... 목하 고심 중이다.
아침의 누리길
어제는 10코스 고랑포 길(16km)을 끝까지 다 걷지 못하고 가까운 숙소를 찾아 하룻밤을 묵었다. 오늘은 남은 10코스를 채우고 11코스 임진절벽길(18km. 숭의전지-당포성-주상절리-임진물 새롬랜드-허브 빌리지-군남 홍수조절지)을 걸을 예정. 서울로 돌아가는데 3-4시간이 걸리므로 서둘러야 했다. 7시에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펜션사장님의 차로 어제 멈춘 지점인 아미2리 마을회관으로 가서 이어 걷기 시작했다.
아침의 출발~
이른 아침의 누리길은 처음이었다. 매번 긴 이동 끝에 쫓기듯 출발을 해 왔기에, 마음에 한없는 여유가 차오르며 ‘오늘은 또 무엇을 보게 될까?’ 하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일상의 하루하루도 기대감을 안고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돌아가면 이 기분을 살려 노을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자고 다짐했다.
고려의 종묘, 숭의전
얼마가지 않아 10코스의 종착지이자 11코스 출발지인 숭의전지가 나왔다. 도로에서 봐서는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야산. 가벼운 호기심을 안고 산책로에 올랐다. 상쾌한 아침공기에 취해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며 임진강의 전망에 다가갔다. 시야가 터지는 중턱의 작은 뜰 옆에 돌담으로 둘러쳐진 대여섯 칸 전각이 숨은 듯 돌아앉아 있었다. 고려의 종묘, 숭의전이었다.
안내소도, 경내로 들어가는 대문도 굳게 닫혀 있어 너무나 적막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돌담을 돌며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것뿐. 몰락한 왕가의 종묘를 만나기엔 햇살이 너무나 투명했다. 해질녘에 왔어야 할 곳이었다. 지난 누리길에서 본 반구정(8코스)과 묘하게 대비가 되는 느낌이었다. 고려 유신이자 조선 최장수 재상 황희가 말년을 보낸 반구정의 임진강을 채운 것은 스산함이었다. 반면 이곳의 임진강은 강물이 다 눈물인 것 마냥 슬픔으로 가득하다.
숭의전은 고려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곳으로, 1397년(태조 6년) 앙암사라는 절을 사당으로 개축한 것이라고 한다. 2년 후(정종 1년) 공사를 마치고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했고, 1950년 6.25전쟁 때 전소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72년 재건했다고 한다. 안내문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고려의 종묘가 어쩌다 연천의 임진강 가까지 오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 왕실은 주나라의 예법에 따라 삼국시대 이래 줄곧 정궁의 왼편에 종묘를 두었다.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이후 5년 만에 왕위에 올라 조선을 개창, 고려의 종묘를 허물고 터를 파낸 뒤,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지었다. 그리고 이듬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는 경복궁의 왼편에 새 종묘를 짓는 한편, 충주 문의에 옮겨두었던 고려의 종묘를 이곳 연천으로 옮겼다. 태조 왕건이 궁예의 수하에 있을 때 철원과 개경을 오가며 이곳에 있던 앙암사라는 절을 자주 들렀으므로 그 절을 사당으로 바꾼 것이라고 하는데, 얼핏 듣기에도 고려의 종묘를 경기도의 동쪽 끝에 박아두려는 핑계임이 분명해 보인다.
500년 고려왕국의 종묘가 종로에 있는 조선의 종묘는 고사하고 재상의 유허지보다도 초라해 애잔하기만 했다. 권력이란 이토록 비정한 것인가? 한탄하던 중, 결국 모든 것이 그들의 업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고려왕가는 100년의 무신정권, 또 100년의 친원 권문세족의 권력놀음을 방치하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2년도 과분한 권력이 200년을 버텨가며 결국 왕씨 일가의 몰살을 자초하고, 위대한 선왕들을 욕보였다고 할 밖에.
그에 비하면, 7년이라는 길지 않은 재위기간 내내 암암리에 왕씨일족을 몰살시켜 가면서, 한편으로는 왕좌에서 내려오기 직전까지 최소한의 법도를 지키기 위해 전 왕조의 종묘를 챙긴 태조 이성계의 정치력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비정할지언정 원칙을 확고히 한다는 정치철학이 있었기에 그와 신진사대부는 조선을 안착시킬 수 있었다. 마냥 비정한 권력이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비정한 것은 권력이 아니라 역사의 심판.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500년 역사가 한 순간 망가지기도 하고, 500년 역사가 새로 써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초라한 고려 종묘의 뒷산을 넘으며 우리의 앞날이 평화와 자주와 도약으로 향하길 빌고 또 빌었다.
고구려의 성, 당포성
국도에서 바라 본 임진강
산을 넘어 임진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국도를 걸었다. 야트막한 산길에 이어진 평평한 길은 언제나 발걸음이 가볍다. 적벽을 깔고 앉은 펜션들이 눈에 거슬리긴 하였으나, 그나마 건물이 번잡하지 않고 전망을 가로막지는 않아 다행스러웠다. 고려의 종묘를 남겨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고 황송한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국도를 따라 전방 특유의 대전차방어벽을 지나 고구려의 당포성에 닿았다. 고려에 대한 회한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만나는 고구려 유적.
당포성은 임진강을 감시하기 위해 전망이 가장 좋은 적벽 위에 만든 평성이다. 절벽 쪽에 드러난 현무암 성벽이 여전히 가지런하고 견고하였고, 동서로 흐르는 임진강은 물론이고 배후의 들과 산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성곽 네트워크로 대제국을 건설한 고구려인의 기술과 안목을 실감할 수 있는 입지. 만주벌판과 요동반도로부터 이어진 고구려인의 기운이 발밑으로 전해졌다.
강 건너가 백제였고, 신라였다. 고구려인의 편에 서서 바라보니 임진강과 한강 이남의 땅이 한 뼘만 같았다. 신라는 그 한 뼘의 땅을 지키고자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고구려는 그 한 뼘의 땅을 손에 넣지 못한 탓에 멸망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그 한 뼘의 땅에 갇혀 있게 되었다.
“고구려인은 요동과 만주, 한반도, 일본의 규슈 일대의 지역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다. 대제국을 건설한 뒤 중원으로 향하지 않고 남진을 한 것이 그 증거이다. 우리의 문명은 중국의 아류문명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고구려인의 의식을 키워야 한다. 꼭 통일이 아니라 남북 자유왕래만 되어도 그 자부심을 되살릴 수 있다.”
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대한민국은 할 수 있다. 통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비극, 유엔군화장장
다시 국도, 임진강역을 벗어나 차 없는 도로변을 기분 좋게 걷다 유엔군화장장을 만났다. 지붕과 담장이 허물어진 고대유적과 같은 모습. 무너진 벽 너머로 시신이 들어와 한줌의 재가 되어 나가는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게 그려져 더욱 참담했다. 혼자 멀쩡하게 남은 굴뚝을 타고 하늘로 사라졌을 영혼들. 머나먼 타국에서 죽어간 찬란한 청춘들의 체취가 진하게 풍겨와 절고 고개가 숙여졌다. 과연 그들의 죽음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이유 없는 죽음이 마지막으로 다녀간, 한국전쟁에서 가장 비극적인 현장이라 할 곳이었다.
지난 한국전쟁, 지금의 우크라이나전쟁을 돌아보면 모든 전쟁의 본질은 같다. 전쟁은 결국 사업이다. 무능한 권력은 사악해지고, 끝내 전쟁을 탈출구로 삼는다. 정치적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긴장을 조성하다 스스로 만든 위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 무능과 사악은 더해간다. 대단한 애국자인 양 앞에 나서 무고한 희생을 숭고한 죽음이라 찬양하며 증오심을 자극해 권력을 유지하는 기만행위를 계속한다. 그 사이 전 세계의 장사꾼들은 인류애니 우방국이니 하는 명분으로 한 다리 걸치며 빨대를 꽂는다. 그렇게 전쟁은 정적의 씨가 마를 때까지, 더 이상 돈이 되지 않을 때까지 계속 된다. 전쟁이 끝나면 주변국들은 본격적으로 빨대를 빨고, 그렇게 번 돈으로 새 장터를 찾아 나선다. 무고한 인류의 고통과 죽음을 밑천으로 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장사. 그것이 전쟁이다...
이 땅이 언제든 새로운 장터가 열릴 준비가 되어있는 곳으로 남아있어 그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곳곳에 여전히 꽂혀 있는 빨대들에 화도 났다. 고려의 흥망, 고구려의 기상, 이유 없는 죽음이 모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직 평화만이 그들의 죽음을 이유 있는 죽음, 숭고한 죽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태고의 장관, 임진강 주상절리
길지 않은 구간, 여러 시대에 걸친 의미심장한 유적들을 연속으로 만나 머릿속이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 임진강 주상절리의 장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복잡한 생각을 한 방에 날려버리고도 남는 장쾌한 대자연의 풍경이었다. 평화누리길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고 작심이라도 한 것처럼 11코스가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용암이 급격하게 식어서 굳을 때 육각 기둥모양으로 굳어져 생긴 지형을 말한다. 임진강은 다른 곳에 비해 육각기둥이 선명하진 않지만, 이처럼 내륙에 형성된 주상절리 지형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케이스인데다, 강을 따라 높이 25미터, 길이 2.5km의 절벽이 병풍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을 선사하고 있다.
적벽을 따라 흘러온 임진강이 한탄강과 갈라지는 이 지점부터가 ‘한탄강 유네스코세계 지질공원’ 비경의 시작점이었다. 안내판을 보니 한탄강을 따라 가면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나 볼 만한 신비한 비경들이 즐비한데, 아쉽게도 누리길은 임진강을 따라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망도 잠시, 주상절리를 건너보며 20여 분 둑길을 걷고 나자, 길이 강변으로 뚫려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누리길 여행자를 위해 최근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길... 들어서자 마자 야생의 기운이 덮쳐왔다.
정돈되지 않은 수풀 사이로 난 오솔길. 임진강 주상절리가 바로 눈앞이다. 자연 그대로의 임진강, 그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는 기분을 만끽하며 걸었다. 그러다 건거편 뿐만 아니라 바로 옆 편의 바위들도 주상절리임을 알았다. 멀리서 바라볼 때와 달리 육중하고 거친 바위들이 질주하듯 하늘로 달려 올라가고 있는 모습. 바위가 땅에서 쏟아 오르고, 거대한 용암이 흐르며 천지가 뒤집히던 그날대사건의 일단 멈춤. 가만히 태고의 속살에 손을 대고 그 기운을 온몸에 담았다.
어느 곳을 가나 여행의 절정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편이다.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확신. 경기도의 평화누리길의 마지막 코스가 남아있지만, 여기가 지난 3년간 걸어온 평화누리길의 심연이자 사실상의 종착지임이 확실했다. 김포에서 서해 바다와 조강이 만나는 풍경을 보았고. 문수산 정상에서 조강이 한강과 임진강으로 갈라져 멀리 뻗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행주산성에서부터 한강 이편과 저편의 긴 철책을 따라 걸어 올라와, 파주 반구정에 이르러 철책 너머로 임진강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임진강과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한 끝에 한탄강과 갈라지는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조강과 한강, 임진강과 한탄강, 그 사이 사이 이름 모를 하천들을 따라 올라온 길. 깊은 감회에 취해 유유히 흘러가는 임진강을 바라보았다. 퍼뜩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슬러 올라와서 그렇지, 모든 강물은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합쳐지고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임진강은 한탄강과 합쳐지고, 다시 한강과 합쳐져 조강이 되고, 끝내 바다로 흘러가 하나의 물이 되고 있거늘... 혼자 흐름을 거슬러 걸어오며 강물이 갈라진다고 여겨왔던 것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대로 세상을 본다. 순리에 따라 살면 순리대로 세상이 보이고, 순리에 역행을 하며 살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순리를 거스르는 반칙과 같은 삶은 잠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국 큰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 갈 것이고, 순리에 따르는 삶은 잠시의 고난을 타고 넘으며 도도히 흘러 끝내 바다에 이를 것이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을수록 마음속에 순리를 품어야 할 것이었다. 가슴에 평화를 품고 살아야 평화에 닿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 먼 곳까지 오지 않고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을 임진강의 심연에 이르러서야 깨닫다니... 꼬일 대로 꼬이고, 흐릿해질 대로 흐릿해진 마음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이 마음 돌아가서도 변치 않기를...
임진강에서 빠져 나오며
임진강 주상절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야생의 길은 포장둑길로 올라서게 되어 있었고, 임진강도 펑퍼짐한 산을 돌아 천천히 흐르며 평온을 되찾았다. 강을 터전삼아 살아온 오래된 마을들, 임진물 새롬랜드를 가득채운 캠핑카들, 철새를 찍는 사진사들, 산책을 나온 마을주민들... 야생과 태고에서 막 돌아온 원시인이 되어 무심하게 생활의 세계를 걸었다. 얼마나 더 강둑을 걸어야 11코스 종착지인 군남홍수조절지가 나올지 가늠할 수 없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한가롭기 그지없는 길고 긴 강둑을 걸으며 마음은 점점 급해져 갔다.
고구려 군의 마지막 전투, 고성산보루
이제 강둑을 따라가면 되리라는 섣부른 예상과 바램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민통선 아래의 여러 길을 이어 붙여 만든 평화누리길은 언제 어떤 길이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나의 급한 마음과 무관하게 길은 방향을 틀어 다시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해 저물 무렵 느닷없는 등산을 다시 시작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거늘, 여행의 절정을 맛보고 난 뒤라 그런지 다리가 유난히 무거웠다. 하지만 어쩌랴. 가야할 길이면 가야할 밖에.
아래에서 바라본 고성산보루
계단과 능선의 연속이었다. 강을 내려다보며 걷는 멋진 고성산 길. 하지만 마음이 급해 즐길 수가 없었다. 순리에 따라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작은 오르막을 만나자마자 무너지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걸은 끝에 도착한 가장 높은 능선에 고성산보루가 있었다. 또 다른 고구려 유적이다. 절벽 위 구릉 꼭대기에 둥그렇게 돌을 쌓고 흙으로 덮은 일종의 참호였다. 흙으로 돌을 덮어 올라와 보기 전까지는 위에 이런 진지가 있는 지 알아 챌 수 없는 구조. 가운데 일개 분대가 머물 정도의 구덩이가 있어 숨어 있다 적을 공격하기 좋아보였다.
안에서 본 고성산보루 , 둥글게 돌을 쌓아 참호를 만들었다.
최후의 보루라는 말을 자주 써왔지만 정작 보루라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오로지 방어를 위한 시설임을 즉각 알 수 있었다. 공격하는 군대가 산속에 숨어 있을 일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고구려 군은 고성산이나 호로고루까지 점령을 하고나서 혹시 모를 퇴각에 대비, 능선의 중간 중간에 기습용 참호를 만들어 둔 것 같다. 훗날 그들이 나당연합군에 쫓기게 되었을 때,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먼저 퇴각하고 능선에 있는 몇 개의 보루에 소수의 병사들을 남겨 놓았을 것이고, 그 병사들은 보루에 남아 적군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죽음이 예정된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본진이 무너지면 전쟁은 끝. 최후의 보루가 본진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방어용 참호임을 눈으로 보고야 알았다. 본진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보루와 보루 사이를 숨 가쁘게 뛰어다녔을 고구려 군을 생각하며 능선을 넘고 또 넘었다. 우리민족을 한반도에 갇히게 만든 통한의 퇴로였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기에 더더욱 깊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고구려 병사가 뛰어다녔을 산길
유적과 풍광 속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보낸 탓에 오늘도 완주는 이미 글렀다. 산에서 빠져 나가면 서너 시간 넘게 걸릴 귀가 지점을 찾아야 할 상황이었다. 벤치에 앉아 서툰 검색실력으로 대중교통이 연결되는 기막힌 지점이 없나... 구글링 하려던 중, 옆 벤치에 앉아 계신 어르신 한분과 눈이 마주쳤다. 평화누리길을 걷는 흔치 않은 동지들 간의 인사.
몇 마디 나누고 보니 이분이야말로 걷기의 달인이었다. 정년퇴직 후 국내외의 여러 도보길을 완주하셨고, 평화누리길을 열 번 째 걷고 계시며, 내가 이틀에 걸쳐 걸어온 길을 오늘 하루에 다 주파하셨단다. 11코스를 3년 걸려서 온 내가 부끄러워하자, 처음 걷는 길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느라 언제나 오랜 걸린다며 고수다운 위로를 건네 주셨다.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얘기. 산을 내려가면 아드님이 차를 가지고 태우러 오기로 되어 있단다! 지친 퇴각로에서 천군만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염치불구 대뜸 문산역까지만 태워 주십사 부탁을 드렸고, 어르신은 흔쾌히 허락을 하셨다.
나의 첫 1박2일 걷기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임진강이 이토록 쉼 없이 새로운 풍경을 보여줄 줄은 미처 몰랐기에 더더욱 놀라웠던 길. 그 길에서 태초의 순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았고, 끝내 누리길의 절정을 만나기도 했다. 연천에 이르러 평화누리길이라는 드라마가 진정한 인생작이 되었다고나 할까.
여기까지 3년이 걸렸고,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지는 모르지만, 나는 순리와 평화가 목마를 때마다 이 길에 오를 것이다. 경기도를 넘어 강원도로, 끊긴 길들을 이어가며 동해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