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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Apr 06. 2022

당근마켓에서 요술 거울을 샀다.

선량함에 대하여

  중고물품거래를 위해 당근마켓을 종종 이용한다. 119명 누적 거래 중 119명 만족, 재거래 희망률 100%를 자랑하는 나름 우리 동네 당근마켓 우량 이용자라 하겠다. 대개의 경우 단시간 사용 후 쓰임이 다한 육아용품 판매 위주의 거래를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중고로 구매하는 한 가지는 바로 책이다. 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구간 인기도서나 아이들의 전집은 수월하게 중고 매물을 찾을 수 있는데, 주로 키워드 알림을 걸어두고 컨디션 대비 적당한 가격대의 매물이 나타나면 그때그때 구매한다.

  

  일주일 전 노곤한 졸음이 막 쏟아지던 오후 근무시간, 춘곤증을 깨우는 당근마켓의 키워드 알림이 울렸다. 지난주 키워드 알림을 걸어둔 작가의 책을 9권 일괄 19,000원에 판매한다는 글이었다. 권당 겨우 2천 원 남짓한 가격은 물론이거니와 안내 글의 ‘상태 좋습니다.’라는 짤막한 설명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A급 컨디션임에 대한 단호한 자신감이랄까.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순발력! 재빨리 판매자에게 채팅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거래는 어디서 가능한가요?

-000역 4번 출구 직거래합니다


  000 역이라면 곧 세 시간 이후 퇴근길에 지나게 될 곳이었다. 하지만 10년 차 자차 이용자인 나로서는 매일 지나던 그곳 지하철의 출구 번호에 대해서는 영 까막눈이었다. 지도를 뒤져보고서야 가는 길의 반대편이라는 것을 알았다. 로드뷰를 살펴보니 마땅한 유턴 지점 또한 보이지 않았다. 사실 빠른 유턴이 불가능할 뿐, 둘러 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늘 ‘효율’에 집착하는 나로서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일분일초의 시간은 물론 기름 한 방울이라도 절약해야지, 암.’ 판매자에게 건너와 주실 수 있는지 문의하니 흔쾌히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행히도.


지금 보니 5번 출구를 잘 못 말했는데도, 떡하니 주유소 쪽으로 알아주신 판매자분의 깊은 사려심이 느껴진다.



     

  퇴근길이나 돈 쓰러 가는 발걸음은 대체로 언제나 즐겁지만, 그날 중고 책을 사러 가던 퇴근길은 더욱 설렜다. 여러 권의 책 중 무얼 먼저 읽어볼까, 다 읽기 전까지 차곡히 쌓아둔 책들은 드나들며 보기만 해도 흐뭇할 터였다. 퇴근길 정체가 평소보다 심했지만 부산 운전경력 10년의 기지를 뽐내며 차와 차 사이를 가로질러 가까스로 약속 시간 5분 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시간 엄수는 중고 거래의 기본 매너이니까, 역시 나는 당근마켓 우량 이용자라는 생각에 내심 뿌듯했다.

 

  약속 장소는 곧 삼거리로 나뉘는 왕복 6차선 도로변의 지하철역 출구 앞. 해당 지하철역 출구는 삼거리 우측으로 빠지는 도로의 코너에 위치하는데, 그 코너에는 마침 주유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우회전을 하거나 주유소를 이용하는 차량이 동시에 끝 차선으로 몰려들어, 정차하기에 썩 편한 위치는 아니었다.


  도착 후 힐긋 살펴보니 판매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정지상태로 있는 사람이라고는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아직 안 왔나 보다, 서행하며 차 세울 곳을 살폈다. 길가에 다소 위험해 보이게 멈춰 있는 휠체어를 보자 왜 위험하게 하필 저기 서 계실까, 뾰족한 마음이 들었다. 뒤차에서 빗발치는 빵빵 소리에 떠밀려 어정쩡하게 주유소 입구에 걸쳐 차를 세우고 채팅창을 열었다. ‘저 도착했..’을 입력하던 중, 상대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 도착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있어요




  상대의 메시지를 보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나 좀 편차고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를 건너편 길가로 불러내다니. 준비한 돈 봉투를 서둘러 집어 들고 차에서 후다닥 튀어나왔다. 휠체어 앞으로 곧장 달려가 ‘책 사러 왔습니다’ 하자 할아버지는 그제야 휠체어 위, 양 정강이 사이에 올려두신 책 꾸러미를 꺼내셨다.


  “일찍 오셨네. 쇼핑백이 찢어질 수 있어요. 무거우니 조심해서 들어요.”


  평소 중고 거래 시 눈앞에서 물품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거나 봉투 안 금액을 확인하시라, 하는 나지만 그날만큼은 그런 여유로운 태도를 견지할 수 없었다. 판매자가 채 봉투를 열어보기도 전에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만을 남기고 허겁지겁 도망치듯 책 꾸러미를 안아 들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후다닥 뛸 수 있는 내 튼튼한 다리가 민망했고, 얼른 꽁무니를 빼고 싶은데 하필 도드라지는 내 차의 빨간 색깔이 유난히 부끄러웠다.





  할아버지의 휠체어는 그날 저녁 내도록 내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꽤 무거운 책 꾸러미를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얼른 로드뷰를 다시 살펴봤다. 낮에 살펴본 기억으로 중앙분리대가 있었으므로 신호등이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엘리베이터라도 있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정말 몇 년을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었지만 지하철 이용자가 아닌 내가 집 근처 지하철역의 실정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한가에 대해 통감했다. 천만 다행히도, 고맙게도 그 역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제야 한숨을 놓고 판매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감사합니다. 잘 읽고 다음에 또 구매할게요! 다음에는 제가 꼭 계신 곳까지 가겠습니다.


    



  최근 장애인 이동권을 주장하며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는 휠체어 부대의 지하철 시위가 이슈이다. 일각에서는 선량한 시민을 볼모로 잡는 불법 시위라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언론을 통해 시위 관련 소식을 접하며 사실 나 역시 해당 시위에 대하여 다소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그들의 행동이 다수의 시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므로 자신들이 약자임을 내세운 집단이기주의의 다른 행태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울시민이 아니므로 해당 시위로 인해 내가 겪는 불편함은 전혀 없었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저해하는 편협한 시위 행태는 아무래도 고운 시선으로 봐주기가 힘들었다.


  두 번째는 이러한 행동을 감행하는 시기의 절묘함 때문에 그 의도가 그다지 순수하게 비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정권이 바뀌는 시점에, 그것도 현 대통령이 아닌 다음 정권의 대통령에게 그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것은 상태 개선이 목적이 아니라 분란을 일으키는 정쟁의 도구로 약자를 악용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새 연인에게 ‘전 남자 친구가 이거 안 해줘서 내가 엄청 힘들었거든. 그러니까 너 이거 반드시 해줘야 해’ 으름장 놓는 모양새랄까.



     

  휠체어 탄 할아버지에게서 책 몇 권을 사 오면서 그날 나는 뜻밖에 요술 거울을 하나 얻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요술 거울은 내 안의 선량함을 정직하게 비추어 준다. 이 전까지 나는 올바른 도덕적 관념을 가지고 타인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이라 스스로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양보는 당연한 이치임을 머리로는 이해하는 척했다. 그들을 위한 복지정책이 마땅히 필요하다는 데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정작 소수의 약자가 선량한 다수의 시민에게 폐를 끼치는 시위에 대하여는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저 내 선량함의 잣대로 그것은 분명 온당하지 않다 여겼다.


  휠체어 탄 할아버지를 건너편으로 불러낸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 나는 누구보다 간절히 그곳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기를 바랐다. 내 안에 분명 선량한 씨앗이 살아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여태껏 내 안의 선량함은 순전히 상대가 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반쪽짜리 선량함에 불과했다. 나에게는 나의 시간과 물적 자원을 최대한 아끼는 것이 곧 선이었다. 또한  선량한 시민들이 모여 사회를 이룰 때,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나의 선, 다수의 행복을 깨는 것은 곧 행패이며 악이라 치부했다. 선량하지만 아주 편협하고 옹졸한 시민이었다.




  나 스스로 그토록 온전하다고 믿어왔던 선량함, 그것은 하나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의 나는 선량한 시민의 탈을 쓰고 자신의 차갑고 쌀쌀맞은 면모를 스리슬쩍 감추고 있는 효율 지상주의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선량한 시민인 척하며 그들이 선량한 시민을 공격한다고 비난하며 되려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참이었다. 약자에 대한 배려나 복지정책의 필요성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한순간도 가슴으로 그들을 이해한 적이 없었다. 막막한 계단 앞에서 주저하는 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왜 모든 외침이 적시 적소에, 적법한 형태를 띨 때에만 마땅히 귀 기울여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치부했을까. 따지고 보면 깊이 상처받은 아픔의 순간 우리 모두의 울부짖음은 늘 조금 의아한 순간에, 매우 돌발적이면서도 다소 공격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말이다.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부당함에 대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어서, 무례인 걸 알면서도 이대로 살고 싶지는 않아서.


Ann H 님의 사진, 출처: Pexels



  

  하루빨리 소모적인 시위와 정치싸움이 끝나고 대한민국의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생기길 간절히 바란다. 이는 분명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과도 부합하는 일이다. 중고 거래를  그날. 만약 그곳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줄곧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튼튼한  다리를 가진 선량한 시민  누구도  훗날 자신이 휠체어에 앉지 않게 되리라 확신할  없지 않은가. 또한 장애인들의 눈물겨운 휠체어 행진으로 얻어낸 엘리베이터 이용을 거부할 선량한 시민도 없을 .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누리는 수혜자는 결국 나와  가족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 연로해 지팡이를 짊어질 나의 부모가, 유모차에  어린  아이가, 어쩌면 휠체어를 타게 될지도 모르는  혹은 아주 가까운 지인이 말이다.


  또한 전 연인에게 채움 받지 못한 사랑, 새 연인이 조금 넉넉하게 품고 토닥여주고 사랑해주면 어떤가. 조금 삐뚤어진 자세로 요구한다 한들 미우나 고우나 끌어안아야 하는 우리 국민 아닌가. 연애 초반에 누구나 괜한 생떼를 쓰며 상대의 진심과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 그 또한 충분히 이해 간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무척 행복한 일이니까.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세세한 배려와 확실한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면 어쩌면 반대편이었을 누구라도 더욱 깊게 감동하며 그 손을 굳게 잡아줄 수 있을 테다.


  진정한 선량함은 타인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기를 자처하는 마음 아닐까. 시간을 들이고 기름을 써가며 불편한 이웃을 위해 조금 둘러가기를 자처하는 마음. 혹은 휠체어로 이동이 불편하지만 상대의 편의를 위해 기꺼이 길을 건너와주는 작지만 아주 큰 배려. 우리의 이웃들이 자신의 깊숙한 내면에 숨기어진 진정한 선량함을 끊임없이 시추하여 끌어내어보길, 그렇게 케어 낸 아주 작은 선량함의 씨앗을 부디 무럭무럭 아름답게 키워내길 바라본다.




  선량함을 비추어주는 요술 거울 되사실 분 찾습니다. 물론 가격은 무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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