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방에서 잤다. 각자의 방이 있는데 엄마는 굳이 내 방에 동생이 침대를 밀어 넣고 둘이 같이 자야 한다고 했다. (엄마의 양육 방식에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았다.) 덕분에 나는 방의 거의 전부를 침대들에게 내주고 중고등학교 6년 간 좁은 통로 공간만 남은 방을 보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사춘기 여학생에게 6살이나 어린 얄밉고 귀찮은 동생이 밤마다 방으로 쳐들어온다는 것은 수시로 불쾌하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제법 재미있는 날도 많았다. 유치한 싸움도 많았다. 말싸움에서 나는 주로 졌다. 어린 동생한테 진다고 엄마는 혀를 차면서도 승리의 비법 같은 걸 알려주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엄마조차 동생이를 말싸움으로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동생이 녀석은 싸움에서도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다. 그날도 나는 졌다. 그 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결국 “어디 두고 봐.”라고 씩씩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뿐. 그리고 나는 그것을 증명해내고야 말았다. 그날 밤, 동생이는 다리가 가시에 찔리는 꿈 때문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들춰낸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넣어둔 두툼한 드라이 빗이 그녀의 종아리께 놓여있었다. 뾰족뾰족한 빗살이 밤새 꿈속으로 찾아들어온 것이다. 그렇다 나는 복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복수는 일방적으로 끝나는 법이 없지. 하루는 교실에서 체육복을 갈아입기 위해 실내화를 벗고 바지를 입으려는데, 친구가 물었다.
둥둥아, 발바닥에 그거 뭐야?
발바닥을 스윽 들자 표독하게 눈앞에 다가오는 선명한 두 글자. “바보”. 반대편 발바닥을 열어보았다. “여긴 없을 줄 알았지?” 결국 우리 자매의 복수전은 친구들에게까지 모두 알려지게 되었다. 집안일은 집안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이후로도 비슷한 방식의 복수 핑퐁이 한 동안 이어졌다. 사실 이런 복수전은 내 인생에 거의 없다. 나는 함부로 복수하는 경거망동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기억에 남는 대단한 복수도 없다. 쫄보들이란 다 그렇게 산다.
복수가 간절했던 사회 초년생에겐 억울한 일이 많다. 그만큼 짜릿한 복수를 자주 상상했다. 하루는 친구가 편집실 문을 쾅 열고 들어왔다.
야! 나 어제 복수했잖아.
(드디어! 네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대의를 이루었구나. 오늘 우리가 축배를 들자!) 빨리 얘기해봐.
이미 충분히 감정이입이 된 상태로 나는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녀의 똑 부러지고 야무진 성격을 기반으로 복수 유형을 떠올려본다. 통쾌한 말로 반격했을까? 그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지적해 창피를 줬나? 곤란에 처한 그를 멋지게 도와주며 냉소적인 한마디 쏴주었나?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는 그의 만행을 공유하며 함께 열을 내고 복수란 판타지를 얼마나 크게 키웠던가. 긴장된다. 꿀꺽. 그리고 기대되니까 어서 말해봐.
어제 방송 털고 회식하면서 그놈이 건배하자고 앞으로 손을 쭉 내밀더라. 근데 나 건배 안 해줬어. 내가 뭐 그렇게 호락호락해?
(이보게 친구. 잘 했구먼. 자네만 통쾌하면 그것이 진정한 복수인 것이지 뭐.) 야, 나도 복수했어. 월요일에 그놈 수고했다고 팀장님이 다 같이 손뼉 쳐주자고 했는데 난 박수 안쳤잖아.
잘했어. 그놈은 박수받을 자격도 없어!
우리는 꾸준히 복수했고 자주 서로의 성취를 자랑하고 치하했다.
나는 복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성장했다. 신데렐라의 두 언니와 계모, 백설공주의 마녀, 헨젤과 그레텔 속 마녀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읽으며 함께 기뻐했다. (복수의 대상이 모두 여성인 것은 이상하다.) 인생은 결국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복수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방점은 어디에 찍혀있을까? 잘 복수해야 결국 인생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라면 나는 이제껏 실패자로 살고 있다. 원론적으로 파고들면 복수하려면 우선 당해야 한다는 전제가 생기는데. 당하지 않는 인생이야말로 승리자의 삶이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아니다. 나는 당하지 않은 인생도 아니고, 복수한 인생도 아니다. 그저 잘 먹고 있는 인생이다. 30%의 잠재적 위너. 긍정적인 단어인 것 같다.
마음에 심한 생채기가 생기는 날 집에 오면 화면 위에 쏟아놓는다. 감정을 배설하는 동안 화가 누그러지라고 하는 행동인데, 오히려 그 순간 미움이 인증을 받은 양 본격적으로 자라난다. 종이에 쏟아내는 순간 미움이 세상 밖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로도 달라진 것은 없다. 어딘가에는 꺼내야 하는데 현재로써는 모니터 화면이 가장 평화적인 합의 공간이다.
또 누군가는 그랬다. “작가와 척지지 마라. 인쇄기로 찍어서 복수하는 자들이다." 재능을 통한 복수는 멋과 치졸함을 동시에 가진다. 나도 인쇄기로 찍어서 복수하는 경험을 상상해본다. 가장 좋은 복수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동안 진심으로 행복하다. 그런 일은 언제까지나 상상 속에 머물러 있을 테지만 그래서 더욱 극적으로 상상한다. 가장 좋은 시나리오처럼 되지는 않더라도 언젠가 그런 이야기들을 인쇄기에 찍어낼 수만 있다면 복수 따위 상관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복수는 내가 행복하면 하찮은 일이 되는 것인가 보다. 요즘 세상엔 복수의 드라마와 뉴스가 왜 이렇게 많은 지 조금 알 것 같다.
인쇄기에 찍어내지는 못해도 키보드로 찍어내 보려고 복수하고 싶은 누군가를 소재로 이야기를 써볼까 하다가도 겁을 집어먹고 눈을 질끈 감는다. 복수라니, 내가 키보드로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 마치 주술처럼 실제로 그에게 나쁜 일이 생겨버릴 까 봐 겁이 난다. 복수는 용감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용감한 사람은 복수하고 행복한 사람은 복수하지 않는가 보다. 그 사이에서 용감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은 늘 복수를 꿈꾼다. 그 첫 단계로 복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진상조사를, 혹은 뒷담화를 진행한다. 오늘도 집에 가서 동생이와 진상 조사를 해야 한다. 용기 없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복수하지 못해서 바쁘게 산다. 오랜 진상조사를 하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