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함을 솔직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나쁜 말도 멋인 줄 안다. 어떤 말은 독인 줄 아니까 뱉는다. 가장 통쾌한 복수라면 그 말이 멍청했다는 걸 세상이 다 알게 하는 건데 그러려면 세상이 다 알게 유명해지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어려운 걸 해낸 사람들이 받은 거절 편지를 모은 《악평》이란 책을 읽었다. 거절만으로도 상처가 될 것을 이렇게까지 독하네 싶은 편지들이 책 한 권 만큼이다. 이렇게 수고롭고 독창적이게 거절하는 정성은 어떤 마음인지 궁금하다. 그 마음을 커트 보니것은 이렇게 정의했다.
오랫동안 나는 어떤 소설에 대해 분노와 혐오를 표하는 서평자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사람은 완전 무장을 하고는 뜨거운 캔디 아이스크림이나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공격하는 사람 같다.
본인도 이런 편지를 받아봤으니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다.
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1973)
증오할 책이 있다는 것은 때로 좋은 일이다. (파이프를 비워 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증오한다. - 피터 프레스콧, 뉴스위크-
이젠 중고가로 몇 배를 줘도 구하기가 힘든 “챔피언의 아침식사”인데 싫으면 그만이지 증오하는 애를 쓰고 그런담. 그 수고 덕분에 지금까지 공개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런 용감한 악평도 있다.
리어 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1605)
이 희곡은 심각할 정도로 미완성작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조지프 워튼, 어드벤처러 (The Adventurer), 1754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1601)
조야하고 야만적인 작품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라면 아무리 상스러운 사람들이라도 참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술 취한 야만인이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768년에 볼테르 Volaire가 한 말, 볼테르 작품집(The Words of M. de Voltaire, 1901)
모비딕 (허먼 멜빌, 1851)
로맨스와 건조한 사실을 볼썽사납게 섞어 놓았다. 멜빌 씨는 너그러운 독자들이 (멜빌 씨) 자신의 실수와 과장된 영웅담을 최악의 정신병자들을 다룬 쓰레기라며 내팽개쳐 버리더라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가 비록 예술가적 능력의 연마를 경멸하는 것 같긴 하지만 배울 능력이 아주 없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앤서니엄-
당시엔 소신발언이었을지 몰라도 이 작품들이 수백 년이 지나도록 사랑받는 고전이 된 마당에는 망신일 수밖에. 여러 거절의 편지 중 이 편지 앞에 나는 자지러졌다. 이토록 점잖고 겸손하게 멕이는 편지는 원본이 갖고 싶을 정도다.
중국의 어느 경제 잡지가 보낸 메모
선생님의 원고를 읽으며 한량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만일 저희가 선생님의 논문을 싣게 된다면 그보다 낮은 수준의 글은 더 이상 실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수천 년 동안은 선생님의 논문과 맞먹을 만한 글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전무해 보이기에 저희는 눈물을 머금고 이 고귀한 원고를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저희의 단견과 소심함을 굽어살펴 주실 것을 수천번 머리 조아려 앙망하나이다.
극진한 거절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웃음보가 부풀어 오른다. 책상 위에 이 편지를 써놓고는 엉덩이가 보이지 않게 뒷걸음질로 나갔을 것 같다. 직장인들에겐 거절이 흔하다. 가장 많이 쓰는 말은 ‘생각해보겠습니다. ’, ‘팀에서 함께 논의해보겠습니다.’ 정도 아닐까. 나는 왜 이 중국인처럼 정중하게 창의적이고 고결하게 멕이는 거절을 못하고 진부하기만 했을까. 이제라도 늦은 거절을 해본다.
과장님의 제안을 받고 한량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만일 제가 이 프로젝트를 맞게 된다면 그보다 낮은 수준의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과장님의 제안과 맞먹을 만한 업무를 다시 만날 가능성이 전무해 보이기에 저는 눈물을 머금고 이 고귀한 제안을 반려하고자 합니다. 저의 단견과 소심함을 굽어살펴 주실 것을 수천번 머리 조아려 앙망하나이다.
뭐 그런 비슷한 거절의 장에 초빙된 적이 있다. 너무 좋고 훌륭한데 우리가 부족해서 따라갈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번에는 우리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이런 좋은 기획은 다음번 능력이 닿을 때 도전해보자. 정도의 거절이었다. 배려 깊은 거절이라고 생각했는데. 속 깊은 멕이기였나?
능숙한 기술이 없는 데다 익히기도 쉽지 않다는 걸 자각한 후 나는 그냥 솔직해버리기로 했다. 걱정이 되는 대로, 좋은 대로, 싫은 대로 말하기로 했다. 어떤 일이든 조금은 부정적인 예상을 먼저 하는 탓에 좋은 말을 많이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미안한데 지나버렸으니 사과할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뭐.
대신 공평하게칭찬을 들어도 썩 순수하지 못했다. 공치사나 사탕발림으로 의심하고, '아, 결국 그 걸 지적하려고 앞에 얼러주었구나.' 시무룩하거나 '사람 참 칭찬 헤프네.' 했다. 거절도 칭찬도 의도를 순수하게만 접수하지 못했다. 나만 유난했나. 능숙한 거절과 칭찬의 비결은 역시 별게 없이 진심인데, 진심을 받아도 의심하고 진심을 전하기는 두려운 생활을 너무 오래 했던 것 같다. 결국은 정공법인데. 가장 좋은 한 방은. 말은 이렇게 해놓고 또 실전엔 약하다. 에잉.
그래도 최소한 누군가의 마음에 앙금으로 오래 남을 심한 말은 하지 않아야지. 내가 저 거절 편지를 보낸 사람들과 같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고 내가 거절한 누군가가 유명해지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조심히 살아야지. 할퀴지 않게. 서툴러도 의도를 감추거나 비틀어 생각하지 말고. 정중하게 예의 있게. 우선은 거기까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