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이 어때서

by WonderPaul

며칠 전 엄마가 뜬금없이 동생이에게 개명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어릴 땐 예뻤는데 나이 먹으면 못쓰겠어. 할머니 되면 이름이 좀 그렇잖아. 개명시켜줄게.
그래! 이름 너무 막 지은 거 아냐?
난 귀여운데. 요즘은 그런 이름 많잖아.
뭐가 많아! 학교 다닐 때 한 명도 못 봤다구! 애 이름을 여섯 살짜리한테 짓게 하는 게 어디 있어!
예쁜 이름 지어준 건데...


그렇다. 나는 여섯 살 머리에서 나올 만한 열다섯 개의 이름 중 가장 좋은 후보 십 여 개를 늘어놓았고 그중 선택받은 이름이 지금 동생이의 이름인 것이다. (흔치 않아서 실명을 밝히긴 곤란하다.) 동생의 출현으로 갑작스럽게 언니가 된 여섯 살이 간과한 것은 그 이름이 사람보다 애완동물에게 많이 붙여주는 이름이라는 것뿐이었다.


어젯밤 재차 확인한 바, 동생이의 개명은 당면과제가 되었다. 30년 간 동생이의 이름을 책임졌고 개명이란 상황을 초래한 책임자로서 새로운 이름에 대한 책임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번엔 40년, 아니 60년을 써도 질리지 않고 시대를 초월하여 세련미를 뽐낼 수 있는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 것이다.


신생아실을 떠나 집에 막 도착한 (것처럼 기억 속에 편집되어 있는) 동생이가 방 가운데에 누워있다. 가족들이 에워싸고 내려다보는 시선이 영 마뜩지 않았겠지만 아직 말을 못해서 언짢은 기분을 참고 있는 동생이를 두고 우리는 각자 몇 개씩 이름 후보를 내놓기로 했다. 그리고 시작 전 나는 선언했다.


보라는 안 돼! 보라라고 지으면 나는 안 부를 거야. 보라는 싫어. 돌림자도 싫어. 나랑 완전히 다른 이름 지어줘.


여섯 살 주제에 내 이름도 아닌 것에 어이없는 자기주장을 펼쳤다. ‘보라’가 왜 그렇게 싫었는지. ‘보라’라고 짓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세상 수많은 이름 중 ‘보라’를 선택할까 봐 먼저 나서서 입막음을 한 것이다.


결국 ‘보라’는 후보에서 1등으로 탈락했다. 내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후보에 오르지도 않았을 텐데 억울한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된 것이다. 그때의 미안함으로 이제와 보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건 명분이 약하다. 동생이와 ‘보라’는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동생이는 마침 동그라미가 많은 이름을 원하고 있다. 그래야 성격이 좋아 보인다나. 지금 네 이름에 동그라미가 있지만 그게 네 성격과 무슨 상관인 것인지 먼저 생각해 봐라.라고 말하고 싶다.


개명을 고민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동생이가 원하는 것처럼 동그라미가 상당히 많이 배치된 우아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여고시절 약간의 짓궂은 별명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고전미와 세련미를 다 갖춘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다만 성과 함께 부르면 갑자기 할 말을 잃게 되는 이름이었다. ‘상인’이의 성은 정씨였고, 훗날 특수교사의 꿈을 이룬 후 개명을 고민했다. 진지한 고민 끝에 개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생이도 막상 30년간 불린 이름을 단박에 내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30년간 너무 많은 이야기와 시간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명은 쉽지 않을 것이다.라는 건 내 생각이다. 동생이는 지금 상당히 상기되어 보인다.


예상에 없이 작명을 고민하게 됐다. 내가 고민할 일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고민한다. 동생이는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나이이고 내가 원하는 이름을 거부할 만큼 말도 충분히 배웠다. 엄마는 작명소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무래도 입지가 좁은 것 같다. 은근히 나를 ‘작명 실패자’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고민한다.


영어인 듯 한글인 듯 자연스러운 이름이 시대적 흐름에 걸맞은 것 같아 하나 생각해둔 이름이 있다. 튀는 이름이 몹시도 싫다던 너였으니까 클래식한 이름을 생각해보았어. 마리. 성격도 좋아 보이고 온화한 느낌이 폴폴 나는 것 같지 않니? 김마리. 동그라미가 없어서 싫다고 하겠지? 그럼 동그라미를 넣어볼까? 김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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