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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소울 Jun 23. 2021

여행이 내게 가르쳐준 것

- 혼자 지낸 제주도에서 만났던 행운들 -

2020년 1월 1일. 제주도 구좌읍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새해 아침을 열었다. 시간이란 녀석은 해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쉼 없이 재깍재깍 가기만 하니, 이렇게라도 딱 구분을 지어줘야겠다 작정하고 간 여행이었다.


내가 묵은 곳은 서점과 같이 운영하는 북스테이였다. 1층은 서점 겸 카페이고 2층은 게스트하우스였는데 1인실이 딱 두 개뿐이었다. 첫날은 나 외에 다른 숙박객이 없었다. 사장님 부부가 직접 만들었다는 빵과 스프와 샐러드가 조식으로 제공되었다. 조용한 서점 안 테이블에 혼자 앉아 아침을 먹고 나니 사장님 부부가 따뜻한 커피를 들고 스윽 와서 내 앞에 앉았다.


“음식은 입에 잘 맞으셨어요? 우리 같이 새해를 맞게 되었네요?”     


우리는 마치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집에서 빵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하지만 성공했다는 이야기)부터 이 주변에 오름이 많은데 그 중 산책하기 제일 좋은 오름이 어디인지 알아냈다는 것까지. 나를 애써 소개하지 않아도 사장님 부부의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마주 앉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산책하기 좋다는 오름에 저도 가보고 싶은데요. 어떻게 가면 되나요?”

“여기서 쭉 걸어가시다가 공사 중인 단독주택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아! 그런데 동네 어르신들이 목줄 없이 큰 개를 데리고 산책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보기엔 좀 무서울 수 있는데 다 좋은 분들이라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여보! 그냥 같이 다녀 와.”     


여자 사장님의 카리스마 있는 한 마디에 남자 사장님과 둘이 나가게 됐다. 오름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다. 마을에 있는 여러집들을 지나쳐 가야 했다.


“마을에 길고양이가 많네요. 근데 다들 털 빛깔도 곱고 건강해 보여요.”

“네. 마을 사람들이 각자 몇 마리씩 맡아서 밥을 주고 있거든요. 저희도 밥 주고 있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얼마 전부터 한 마리 더 늘어났지 뭐예요.” 


길고양이들이 담이며 집 앞에 평온하고 나른하게 누워있었다. 마치 애니메이션 <고양이의 보은>에 나오는 고양이 왕국에 사는 고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껏 꾀죄죄하고 불안한 눈빛을 하는 길고양이들만 봐왔기에 눈앞에 보이는 이 풍경이 내게는 판타지 같았다.      


서점에서 밥주는 고양이 1번 (2번은 밥먹을 때만 온다)


“순돌아~~~ 나 왔어~~ 잘 있었지? 아구! 아구!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이따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올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사장님은 인사를 해야겠다며 갑자기 어느 집 대문을 열었다. 사장님이 인사하고 싶었던 대상은 놀랍게도 커다란 흰색 진돗개였다. 자칫 무섭게 보일 수 있는 큰 덩치의 순돌이는 사장님을 보자마자 혓바닥을 내밀고 팔짝팔짝 뛰며 아기처럼 반가워했다. 그 상황이 너무 귀엽고 재밌어서 나는 웃고 말았다.     


오름을 구경하고 나서 내려오는 길에는 사장님 부부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 원래 서울에서 살다가 제주도로 내려오게 된 이야기, 서점과 게스트하우스를 짓기까지 고생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사장님은 동백꽃이 얼마 전에 져서 아쉽다며, 곧 있으면 벚꽃이 예쁘게 피니까 그때 또 한번 놀러 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혼자만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고심해서 책을 고르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서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집중이 안 될 때는 밖에 나가서 동네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예쁜 카페를 발견하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돌아와서 책을 읽었다.     


동네 한바퀴 돌다가 찍은 제주도 풍경


점심에는 동네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맛집 한 곳을 사장님 부부에게 추천받았다. 우럭 정식을 하는 작은 식당인데 1인분은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다행히 그날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애절한 눈빛으로 식당 사장님에게 “우럭 정식 1인분 될까요?” 물어보니 된다고 했다.     


메인요리인 우럭 튀김과 간장 게장, 배추 된장국을 비롯한 가정식 밑반찬들이 나왔다. 처음 먹어보는 우럭 튀김이 너무 맛있어서 혼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 허겁지겁 먹었다. 지금껏 밖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서 맛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사실은 혼자라서가 아니라 맛이 없어서였을까 싶을 정도였다.    

 

혼자 먹어도 엄청 맛있었던 우럭 정식


배가 어느 정도 불러오고 나서야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말소리가 들렸다. 동네 이장님을 모시고 마을의 젊은 아저씨 몇몇이 회동을 하는 듯했다. ‘제주시 계획대로 동네를 개발할 것인가’에 대한 찬반 의견이 열띠게 오고 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제주도 사투리였다. 생생한 제주도 사투리를 살짝 엿듣고 있는 순간이 마치 다른 시공간으로 떠나온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신기한 경험은 다음 날도 이어졌다. 조식을 먹으려고 서점에 내려갔는데 숙박객이 한 명 더 있었다. 전에도 묵은 적이 있어서 사장님 부부와 아는 사이라고 했다. 아침을 먹고 네 명이 같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다가 서점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음반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장님 부부가 모아 온 한국 가요계 명음반들로 나는 그들보다 나이가 조금 어린 편이어서 잘 모르는 것들이었다.     


“여기 있는 음반 중에서 가장 명음반을 꼽는다면 뭐에요?”

“너무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김현철 데뷔앨범을 좋아해요. 이땐 정말 천재가 등장했다고 사람들이 다 그랬어요. 혹시 <춘천가는 기차>라는 곡 들어보셨어요?”     


남자 사장님은 김현철의 데뷔앨범 LP를 찾아 음악을 틀었다. 나는 이제껏 김현철이 가수인 줄은 알았지만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는 잘 몰랐고 TV 예능프로그램인 ‘복면가왕’ 패널로 더 익숙했다. 애절한 발라드 일색이었던 80년대 후반 한국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시티팝 감성의 음악을 처음 시작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날 우리는 가만히 앉아 김현철 앨범 1, 2, 3집과 이소라 1집 앨범까지 듣고 나서야 헤어졌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말하지 않은 사연도 있고, 집에 두고 온 바쁜 일도 분명 하나쯤은 있을텐데, 그 시간만큼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서 귀 기울여 노래를 들었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성인 네 명이 제주도까지 와서 같은 마음으로 지금 들어도 좋은 오래전 가요들을 오전 내내 들었던 그 날이 어쩌면 꿈이 아니었나 싶다.     


여행자는 늘 행운을 기대하면서 떠난다. 행운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약은 없다. 나에게는 특별한 날이겠지만, 실제로는 1년 365일 수많은 평범한 날 중에 하루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행운을 자주 마주친 여행은 몇 년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가 없다. 평소에 안 먹던 것을 먹고, 본 적 없는 것을 보고, 들은 적 없는 것을 듣는 것이 여행이라면, 그 이틀동안 작고 평범한 것에서 새로움과 감동을 발견해나가는 여행의 방법을 배웠다.       


그 여행의 중간에서 내가 적었던 메모를 발췌하며 이제 글을 마쳐야겠다.


“나는 요새 마음이 자주 아프고, 자주 감동받고, 자주 운다. 이런 것들은 내 부모나 주변 어른들에게서 보지 못한 모습이고, 어린 나로서는 감정낭비가 심해서 해 볼 만한 여유를 가져본 적 없는 선택지였다. 내가 무언가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그냥 나이고, 그 이상의 것은 될 수 없다. 다만 내 남은 삶이 세상의, 사람들의, 내 안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감탄하고 잊지 않도록 기록해나가는 여행과도 같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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