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사과가 최고지.
나는 오늘도 사과 한 알을 슥슥 깎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두 개를 깎아야 하나 했는데... 남편 J가 딱히 배고프단 소리 없이 샤워하러 가버린다. 그럼 한 알. 어제저녁 식사가 늦어서 오늘 아침은 공복으로 결정했으니 내 건 아니고 순전히 고망이 마마를 위한 것이다. 당도 괜찮은 소과 하나랑 유산균 섞은 우유 150미리에 시리얼. 이것이 요즘 주로 등장하는 고망이의 아침식사다. 요즘 사과가 다시 좋은지 금세 깎아놓은 걸 다 먹고 우유도 마시고 아기 그릇에 3분의 2쯤 채워놓은 뽀로로 시리얼도 클리어한다. 사과를 먹긴 해도 씹어서 즙만 삼키고 과육을 줄줄 뱉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리얼은 우유와 따로국밥이다. 시리얼 과자를 먹는 것과 다름없다.
고망이는 그러니까, 편식가다.
일단 많은 또래 친구들처럼 채소는 일절 안 먹는다. 김도 채소라면 김 정도만 먹는데 그것도 비수기, 성수기가 있는지 작년에는 엄청 많이 먹었지만 요즘은 안 먹는다. 채소로 놀이를 해서 친숙하게 만들어줘 먹여 보라는 권고를 따라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부모가 일단 먹자 먹자 하면 우거지상을 쓰되 한두 번은 먹어보는 아이들과 달리 고망이는 씨알도 안 먹혔다.
고기는 소, 돼지(가금류x)로 양념이 안된 생고기만 먹는다. 주로 구이로 먹고 찌거나 국에 들어간 것은 잘 안 먹는다. 생선은 좋아하지만 조개, 갑각류는 거부. 계란은 먹고 가공육은 스팸만 먹는다.
밥과 국은 먹는다. 소스 종류를 싫어해서 카레, 짜장, 떡볶이는 안 먹고 심지어 케첩 뿌리는 것도 싫어한다. 면도 일절 거부. 크림이나 토핑이 안 들어간 빵은 먹는다. 그러니까 외식하면 먹을 게 너무 제한된다.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더 어렸을 때부터 채소를 맛보고 느껴볼 수 있는 경험을 많이 하게 해줬어야 한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
이유식 시기에, 그때 한창 유행하던 '아이주도 이유식'을 해보겠다고 채소 만지며 놀게 하고 익혀서 손에 쥐어 먹게 해봤던 1인이다. 그때는 그 모든 것을 거부감 없이 잘 먹었다. 그래서 건전한 입맛을 타고났다고 흐뭇해했는데 그것이 착각이었다. 브로콜리, 토마토 뜯어 먹고 파스타 먹던 아기가 유아식 하면서 완전히 편식쟁이가 된 것이다. 입안의 근육처럼 그런 감각 요소들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성장할 줄은 몰랐다. 채소를 잘 먹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 내림.
여하튼 그러하다 보니 고망이의 식단은 아주 심플해졌다. 초반엔 이것저것 해서 먹여보려고 애써봤지만 소득은 없고 얼굴이 마귀상이 되는 것 같아 포기했다. 포기했더니 얼마나 편한지! 밥에 국, 계란, 소/돼지고기구이, 생선구이, 햄 구이를 적절히 조합하여 내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사이사이 주먹밥(멸치볶음 부숴 넣은)과 볶음밥(채소를 형체 없이 다져 넣은)을 끼워 넣고 야채주스와 과일을 챙겨준다.
그래도 먹는 게 있고 좋아하는 건 잘 먹잖아? 그게 어디야? 키가 당장은 쑥쑥 자라진 못하겠지만 앞으로 기회가 있다. 농구시켜!
가끔 집을 방문한 어르신들이 고망이의 식판을 보고 너무 부실한 거 아니냐고 지적하신다. 가끔은 밥에 햄만 먹는다든지 국만 먹는 고망이를 보면서 내가 요리에 더 능한 사람이었으면 좀 달랐을 텐데 싶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죄책감은 상황을 개선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되므로 그쯤에서 생각을 멈춰버린다.
임신, 출산을 겪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인지 쪽 뇌 크기가 줄어든다는 과학적 보고가 있다고 한다. 아기 양육을 위해 절로 뇌 연결망이 가지치기된다는 것이다. 어쩐지 다른 분야 쪽 어휘나 용어는 생각이 안 날 때가 많고 예전만큼 이해도 안 되는 걸 실감한다. 하지만 좋은 점은 이것이다. 깊이 생각할 능력이 안돼선지 생각을 원하는 대로 어느 정도에서 멈춰버리는 게 가능하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 몇 날 며칠 밤잠을 못 이루던 과거와는 다르다.
날이 더워지고부터 고망이는 부쩍 밥 먹자는 말에 싫다는 소리를 잘한다. 그래도 몇 가지 주장하는 게 있다. 사과, 시리얼, 토스트랑 카야잼, 밥에 햄이다. 나 역시 그 정도만 돌려먹고 살고 싶다. 하기도 참 간단하고 맛도 있다. 게다가 설거지 거리도 적다! 그러고 보면 나도 작년에는 찬 녹차 물에 밥을 만 오차즈께만 수일 동안 먹었고 또 그전에는 타코만 먹었던 시기도 있었다. 분명 채소를 좋아하고 가리는 것도 적지만 정작 스스로 해먹지를 않으니 고망이의 식사 패턴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의 최애 음식은 스시다. 밥에 생선만 올린 초 미니멀한 음식. 한정식이나 뷔페는 거의 가는 일이 없다. 어머님들이 반찬을 해주셔도 끝까지 먹는 일도 적다.
영양은 어떻게 하냐고 지적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여름이니까 봐주세요.
#그래도_우린_카레는_좋아하는데
#카레는_자주_만들어줄수도_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