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아름다운 경험

삶이 고조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

by James Kim




“풀베기는 계속되었다.

레빈은 시간 감각을 잃어버려서

지금이 이른 시간인지 늦은 시간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주는 변화가 생겼다.

일하는 도중에 이런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잊어버리는 것인데, .....

하지만

무슨 일을 하는지 의식하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그 즉시 노동의 중압감을 느끼고 풀도 잘 베어지지 않았다.


― 레프 톨스토이 (LEV TOLSTOI)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에서 장대한 소설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소설을 읽었거나, 아니면 영화를 보았을 명작 ‘안나 카레니나’는 많은 부분에서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나는 특히 레빈의 풀베기 몰입 장면이 오래 가슴에 남아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일이 한창일 때는 풀베기가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이 몸을 식혀주는 한편 등과 머리, 팔꿈치까지 옷을 걷어붙인 팔을 데우는 태양은 일하는 데 필요한 원기와 지구력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무엇을 하는지 망각하게 되는 무아지경의 순간이 찾아들었다. 낫은 저절로 풀을 벴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흔히 여주인공인 안나 카레니나가 아이도 있는 유부녀이면서 젊고 잘생긴 청년 장교 브론스키를 사랑하는 불륜이 중심인 통속적인 내용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는 그들만의 이유와 관점이 존재한다. 안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운명적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결혼 후에 찾아왔으니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 일이 불륜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듯 어쩔 수 없는 일이 사고처럼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기차 바퀴에 자신의 몸을 던져 세상의 논란과 사랑하는 이에게 복수하려 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나는 레빈의 풀베기 몰입 장면이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 실제로 톨스토이 작가 자신을 레빈에게 오버랩 시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건 요즘 말로 하면 거의 ‘플로우(몰입) 상태’에 가까운 경험이 아닐까.

이 상태에서는 의식적으로 애써 집중하려는 노력조차 사라진다. 오히려 집중하고 있다는 자각이 흐려질수록, 몸과 행위는 더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낫이 풀을 스치는 일정한 리듬,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보이지 않는 호흡, 그리고 반복 속에서 점점 가벼워지는 마음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레빈은 더 이상 ‘생각하는 나’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베어지고 쌓여가는 풀과 같은 세계의 일부로 스며든다. 이때 느껴지는 충만함은 어떤 성취나 결과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완전히 일치해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조용한 확신에 가깝다.


몰입의 즐거움(원제 Finding Flow)을 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교수는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은 운동 선수가 말하는 ‘몰아 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경’, 화가와 음악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에 다름 아니다. 라고 그의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떠올리면, 레빈이 들판에서 경험한 순간은 단순한 노동의 몰입을 넘어서는 어떤 상태로 읽힌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려지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간격이 사라지는 체험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그 몰입이 특별한 재능이나 극한의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반복적이고 단순해 보이는 행위 속에서도, 인간은 스스로를 잊고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깊은 기쁨에 도달할 수 있다. 레빈이 느낀 충만함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삶의 의미를 머리로 규정하려 애쓰던 순간에는 끝내 붙잡히지 않던 것이, 몸을 통해 세계와 맞닿는 순간 비로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다. 이때 몰입은 어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이 된다.


또한 몰입의 대가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몰입 경험을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TV를 많이 보는 사람은 몰입 경험을 적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그의 책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 대목은 몰입이 단순히 활동의 종류가 아니라, 그 활동에 참여하는 방식과 깊이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 책을 읽는 행위는 능동적인 상상과 해석을 요구하며, 독자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스스로 메우고 의미를 구성해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의는 한곳에 모이고, 내면은 점차 고요해지며 몰입의 상태로 들어간다. 반면 텔레비전 시청은 상대적으로 완성된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험에 가까워, 의식이 분산되거나 쉽게 이탈하기 쉽다. 결국 레빈이 들판에서 체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몰입은 외부에서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관여할 때 비로소 열리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몰입의 참다운 과정은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결과보다 관심을 다스리는 과정의 한가운데에서 희열을 맛보면 최상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삶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삶을 대하는 방식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외부의 보상이나 평가에 휘둘리기보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과정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쥐게 된다. 레빈이 들판에서 깨달은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더 이상 삶의 해답을 멀리서 찾으려 하지 않고,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이 닿아 있는 자리에서 그것을 찾아 길어 올린다. 그렇게 몰입은 어떤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확장된다. 결국 삶의 깊이는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살아온 그 과정에서 얼마나 진솔하게 온전히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머물렀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교수는 강조한다.

“행복은 우리가 찾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어떤 일 속에서 생겨난다.”

결국 우리는 행복을 ‘얻으려’ 애쓸수록 그것에서 멀어지고, 지금 하고 있는 일 속으로 깊이 스며들수록 오히려 그것에 가까워진다. 삶은 어느 지점에 도달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온전히 참여할 때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더 많이 가지는 것도, 더 빨리 이루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그때 비로소 삶은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 되고, 우리는 살아 있음의 가장 깊은 자리와 맞닿게 된다.


이제 어제 부터 내렸던 봄비에 꽃잎이 젖고, 불어오는 봄바람에 꽃잎이 떨어질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의 우음(偶吟:우연히 읊조리다)이라는 한시를 조용히 읊조리며 흘러가는 봄날을 함께 생각해보자.


우음 (偶吟)

– 송한필


화개작야우 (花開昨夜雨)

‘어젯밤 내린 비에 꽃이 피더니’


화락금조풍 (花落今朝風)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떨어지니’


가련일춘사 (可憐一春事)

‘가련하구나 하루 봄날의 일이’


왕래풍우중 (往來風雨中)

‘오가는 비바람 속에 달려 있구나!




Friday, April 10th.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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