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설턴트의 업무 배정 방식
“이 선생, 우리 프로젝트 릴리즈 되면 당장 들어갈 프로젝트가 없다는데?”
PM(프로젝트 매니저)이 다음 프로젝트를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는데, 안 하겠다고 하니 오늘 나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제안한 프로젝트는 우리 팀에서 힘들기로 유명했다. 지난 5개월간 내가 해온 프로젝트가 시장 수요를 숫자로 분석하는 일이었다면, 새 일은 텍스트 분석이 주된 업무였다. 생소한 분야이지만 앞으로 커리어에 도움은 될 듯 보였다.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도저히 결심이 서질 않았다. 며칠간 그 팀이 일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니 하루 종일 회의실에 갇혀 배달음식으로 사육당하며(?) 보고서를 찍어내고 있었다.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 출근에 새벽 퇴근도 잦았다.
새 프로젝트 기간은 2달 남짓이었다. 2달 죽었다 셈 치고 해 봐? 아니다. 예정된 기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프로젝트가 연장되는 경우가 매우 많고, 기간 내 끝나더라도 괜찮은 성과물을 보여주면 비슷한 프로젝트를 추가로 계약해서 진행하게 된다. 그렇게 발이 묶여 계속 같은 프로젝트를 맴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프로젝트도 그랬다. 분명 나는 입사 전부터 배정되기로 했던 다른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가 고객 사정으로 조금씩 지연되고 있었다. 그 기간에 나는 다른 프로젝트를 전전하며 지원 작업을 했다. 결국 무기한 연기. 한 달간 기다렸지만 갈 곳이 없어진 거다. 그래서 급하게 배정된 게 지금 프로젝트다. 반나절만에 결정이 되어 PM도 나도 어리둥절했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내가 뭘 할 줄 아는지 모르니 PM도 뭘 시켜야 할 줄 모르고. 이번 프로젝트 첫날 PM이 내게 단서를 달았었다. 장기 계약이고, 이번 리포트는 10월 말 마감이니 두 달만 같이 일하고 그 이후 연장 여부는 본인이 결정하라고. 그러나 역시나 예상대로 나는 계속 이곳에 남게 되었다. 고객이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해 새로운 계약을 하기를 원했고, 그 제안 작업을 준비하느라 연말까지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컨설턴트로서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건, 커리어 패스를 결정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10년가량 직장 생활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나름대로는 내 의견을 존중해 주려고 한다. 우리 팀 파트너들과 주기적으로 면담을 진행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희망하는 커리어와 전문 분야가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매번 면접을 보는 심정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면 면담 때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내가 이 프로젝트에서 어떤 성과를 내 왔고, 어떤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 어필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일반 직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보통 회사는 팀이 정해져 있고, 통상 1년에 한 번 정도 조직 개편이 이뤄지며 큰 변화가 없는 조직은 몇 년간 같은 업무를 맡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커리어를 위해 다른 팀으로 옮겨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건, 회사를 그만둘 각오가 돼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잘할 수 있는지를 물어봐 주니 좋다. 스스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고민을 하게 된다. 파트너들은 2주에 한 번 정기적으로 팀 회의를 열어 지금 우리 팀에서 제안 작업 중인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관심이 있는 이들은 지원해 달라고 말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관심은 있었지만 지금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므로 참여 의사를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프로젝트에서 릴리즈 되는 시점이 되었기에,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담당 파트너에게 전화하여 내가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트너는 의사를 밝혀 주어 고맙다면서도, 지금 나의 PM에게 릴리즈 의사를 분명히 하고 방출이 결정되어야만 다른 프로젝트에 배정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나는 참여 가능한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PM에게 릴리즈 의사를 밝히고 싶었다. 바깥세상이 어떤 줄도 모르고 FA 시장에 나왔다가 제안서만 죽어라 쓰고 또 예전처럼 프로젝트 지원 뺑뺑이만 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지금 당장 투입 가능한 프로젝트가 없다고 했지만, 용기 내어 PM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만, 다른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현재 상황으로만 보았을 때는 1월에 당장 프로젝트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그 공백이 싫다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는 없다. 결정권이 주어졌으니 원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얼마나 주변 환경이나 눈치를 보다가 원치 않는 일을 해 왔던가. 하던 프로젝트를 내팽겨 치고 가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받은 것이니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일도 없다. 그래, 운명에 한 번 나를 맡겨보자. 내년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