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일거리가 넘쳐서 고민이었는데 경기가 급속도로 안 좋아지면서 컨설팅 먹거리도 줄었다. 주요 대기업들이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채용을 줄이고 비용 절감에 나섰다. 작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우리 회사도 올해 들어 예정된 프로젝트가 무기한 연기되거나 범위를 줄여서 하게 되었다. 어느 프로젝트에 배정될지 행복한 고민을 했던 컨설턴트들은 ‘어디든 좋으니 들어만 가자’ 모드로 전환되고 있다.
일반 회사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TF나 프로젝트를 하게 된다. 그 기간에는 바쁘고 야근도 많이 한다. 컨설팅은 프로젝트를 업으로 하는 거니, 일단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고객사에서도 한정된 기간에 압축적으로 성과물을 내기 위해 컨설팅 회사를 쓰는 거니 말이다. 프로젝트에 투입되지 못한 컨설턴트들을 두고 벤치에 있다고 한다. 경기를 뛰지 못하는 선수처럼 벤치에 있다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앉아서 놀고만 있지는 않다. 다른 프로젝트를 지원하러 가거나 또 다른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제안서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쁠 때는 벤치에서 쉬고 싶어들 하지만 요즘처럼 일거리가 없을 때는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다. 계속 놀다간 영영 놀게 되는 수가 있다. 들리는 소문에는 어떤 컨설팅 회사는 직원들에게 무급휴직을 권장하기도 한단다. 호황에 급격히 늘린 인력들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된 거다.
최근 한 PM으로부터 받은 프로젝트 투입 제안을 거절하고 어중간한 처지가 된 참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스케줄 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컨설턴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다음 주 스케줄 표가 나온다. 스케줄이 나오기 전까진 다음 주에 내가 어디서 뭘 할지 안갯속이다. 프로젝트를 잘하고 있다가도 갑자기 더 급한 일이 생기면 원래 프로젝트에서 빠지고 다른 데로 배치되기도 한다. 별안간 멀리 있는 고객사로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는 경우도 많다. 보통 직장인이라면 1년에 한 번 정도 있는 조직개편과 부서배치가 매주 이뤄진다고 보면 된다.
이번 주 스케줄을 보니 나는 1월 중순부터 새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내가 파트너에게 하고 싶다고 어필했던 PI(프로세스 개선) 프로젝트다. 내심 너무 기뻤지만 혼자 방방 뛰면 안 된다. 주변에 다른 동료들 눈치도 봐가면서 행동해야 한다. 원치 않는 프로젝트에 배정되어 몇 달간 철야 근무 중인 동료들도 있기 때문이다. 누가 물어보면 애써 담담하게 내 소식을 전할 뿐이다.
최근에 투입되었던 프로젝트는 본사에서 진행되었는데, 새로 들어갈 프로젝트는 고객사 근무다. 집에서 가는 경로를 찾아보니 환승만 3번에 1시간 20분가량 걸린다. 대체 출퇴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나의 담당 파트너에게 카톡이 왔다.
“선생님, 혹시 ㅇㅇ 프로젝트에 관심있나요?“ 내가 배정된 것과 전혀 다른 업무다. 나쁘지는 않지만.. 원래 하기로 했던 PI 프로젝트가 더 좋아서 그렇게 답을 했다. 답을 보내놓고 나니 괜히 마음에 걸렸다. PI 프로젝트도 현재 100% 확정은 아닌 터라 혹시라도 그 프로젝트가 미끄러지면 갈 곳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족을 곁들였다. PI가 더 좋기는 한데요, 제안해주신 그 프로젝트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옳다구나 싶으셨는지 레주메(이력서)를 수정해서 달라하신다. 걸려들었다.
컨설팅에선 레주메 업데이트가 일상이다. 회사 시스템 내 레주메를 공유하고, 우리 회사 직원 누구나 그걸 볼 수 있다. 글로벌 본사에서도 볼 수 있으니 수십만 명에게 내 이력서가 공개된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출신 학교, 거쳐간 회사, 핵심 스킬, 프로젝트 경험, 자격증 등이 낱낱이 공개된다. 일반 회사에서 보자면 아주 민감한 개인정보라 절대 공개하지 않을 정보이나 여기서는 인력이 곧 상품이기에 사내에서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되어 있고, 그걸 기반으로 선택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다. 업무시간 중에 이력서를 대놓고 고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유일한 직종이랄까.
좌우지간 그래서 이력서를 또 업데이트했다. 파트너가 제안한 프로젝트의 업무 범위에 맞게 조정해서 다시 쓰는 일이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어 이력서를 쓰느냐에 따라 내용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해당 프로젝트에 적합한 부분을 더 부각해서 ‘잘 팔릴만한’ 인재로 보이게 하는 일이다.
이력서를 수정하다 보니 파트너에게 또 연락이 왔다. 영어는 어느 정도 하냐고. 자신은 없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유창하지는 않고, 비즈니스 레벨 정도라고. (입사한 이래 줄곧 회사 지원으로 주 5회 전화영어 중이다) 이렇게 매 순간 내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즐기는 이에겐 좋은 직업이고 그렇지 않은 이에겐 끔찍한 직업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