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기다림 대신 프로젝트에 바로 들어가기로 했다. 다른 팀에서 진행 중인 데이터 플랫폼 구축 프로젝트인데, 1년짜리다. 이번에는 고객사에 상주하며 하는 일이다. 고객사에 출입하기 위해 상주 협력업체 사원증을 신청하고, 장비도 지급받았다.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 출근할 때마다 카메라에 보안스티커를 붙여야 하고, 퇴근할 때는 보안검색대도 거쳐야 한다.
오늘이 첫 출근이었지만 지난주에 이미 한 차례 팀원들과 만나 상견례를 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파트너, 이사가 있고 컨설턴트는 나를 포함해 3명이고, 대학생 인턴도 한 명 있다. 이 멤버가 앞으로 1년간 프로젝트를 진행할 식구들이다. 다행히 사람들은 모두 괜찮아 보였다.
고객사에서는 회의실 한 곳을 배정해 주었다. 탑층에 뷰도 아주 좋다. 그 층에는 우리 같은 협력업체들만 모여 있다. 우리 말고도 여러 업체들이 회의실을 차지하고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근무할 공간은 두 평 남짓한 작은 회의실에 8명 정도 되는 인원들이 다글다글 모여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팀 말고도 우리 회사 소속의 다른 팀도 같이 회의실을 쓰고 있다고 했다. 널찍한 우리 본사에서 일하다 고객사에 오니 이렇게 또 셋방살이의 설움이다. 보조 모니터 설치할 공간도 없이 좁은 회의실에서 앞으로 일을 해야 한다. 뭐, 적응하면 될 일이다.
이 일을 하며 재미있는 건 다양한 회사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거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에서 몇 개월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하는 문화도 알 수 있고, 기업 고유 분위기 같은 것들도 느낄 수 있다. 협력사를 위해 전용 계정도 발급되어서 현재 고객사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도 대략 파악이 된다. 이렇게 싱크를 잘 맞춰야 프로젝트도 잘 굴러갈 수 있다. 협력사라고 정보를 주지는 않고 결과물만 가지고 오라고 하면 서로 답답해서 헤맨다. 꽤 많은 프로젝트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 산으로 가고, 서로 힘들어한다. 고객사는 보안 때문에 컨설턴트에게 정보를 주지 않고, 내 마음에 들만한 걸 가지고 와 보라고 한다. 컨설턴트는 헛다리만 자꾸 짚는다. 그렇게 고객사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컨설팅 회사 괜히 써서 돈 버렸다는 소리만 듣는다.
여기에 와서 보니 대기업들은 협력업체와 함께 굴러간다는 걸 새삼 느낀다. 우리는 고객사의 협력업체이고, 또 다른 협력업체와도 함께 일하고, 그 협력업체의 협력업체와도 함께 한다. 고객들은 요구 사항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는다. 여러 회사가 함께 하는 일이라 쉽지는 않아 보였다.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 같은데도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복잡하고, 서로의 일정도 맞춰야 하다 보니 일정이 더디다. 이렇게 일하는 문화에 적응을 해야 할 것 같다.
첫날이라 장비를 세팅하고, 통근버스도 알아보고, 자료들을 훑어봤다. 고객사에서만 쓰는 생소한 용어들이 많아 용어집도 만들어 두었다. 우리 회사에만 시스템이 많은 줄 알았더니 여기 와보니 우리는 애교 수준이었구나. 회사 역사도 길고, 조직도 크니 전사 시스템만 수십 개다. 이걸 효율적으로 운영한다는 게 쉽지는 않아 보였다. 오후에는 콘퍼런스 콜에 들어갔다. 해외에 있는 플랫폼 솔루션 업체라 영어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우리 팀원이 능숙하게 진행하여 나는 옆에서 듣기만 했는데 앞으로 일을 하려면 또 영어와의 싸움이 만만치 않겠구나 싶었다.
장기 프로젝트라는 점이 안심이 좀 되기도 한다. 1년짜리 프로젝트지만 우선 나는 9월 말까지 해보기로 했다. 원하면 연말까지 있을 수도 있고. 선택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장기 프로젝트다 보니 적응이 되면 현업처럼 일하게 될 것 같다. 야근도 제법 있다고 하니 체력도 잘 길러 두어야겠다. 아, 오랜만에 일을 시작하니 무척 피곤하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