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에 문제가 있어서 야근이 많아졌다. 처음엔 저녁 8~9시였는데 결혼기념일이던 금요일에는 밤 12시에 집에 들어갔다.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 보려고 택시를 타고 총알처럼 날아갔건만 남편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새벽 4시 30분에 퇴근을 해 5시에 집에 왔다. 그나마 나는 선발대라 가장 먼저 퇴근을 했고, 나머지 팀원들은 아침 7시쯤 집에 갔다고 한다. 다른 팀원들보다 먼저 집에 온 이유는 '오전 조'로서 그날 오전까지 해결해야 할 임무를 맡아서다. 집에 와서 3시간 정도 잠을 자고 아침 8시에 다시 일어나 씻고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오전조로 편성이 되었건만 결국 저녁 6시까지 일을 했다. 그러나 팀 내부에서는 투덜댈 수가 없다. 나보다 더 많이 일하는 팀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적당히 일을 할만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요새는 아주 간절해졌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한 3개월, 마음 같아선 6개월 정도 일을 쉬고 싶다. 24살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10년 넘게 일을 해왔지만 아직 4개월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 좀 쉬어도 큰일 안 나는 거 아는데, 좀처럼 쉬어지지가 않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지난 주에 그렇게 혹독하게 일을 하고 나니 저녁 8시, 9시쯤 퇴근 하는 날엔 몸이 가볍고 신이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역시 안 바쁘던 시절에 더 눈치 보지 말고 칼퇴를 했어야 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이런 시간도 영원하지 않으니 최선을 다해 누려야 한다고. 그러나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10월에는 3주간 일을 쉬게 되었다. 병가라고 해야 하나, 장기 휴가라고 해야 하나. 건강상의 이유로 3주간 프로젝트에서 오프하겠다고 했다. 지금 하는 프로젝트 팀에서는 3주 후 다시 복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복귀해서 연말까지는 있어 달라고 한다. 10월 말에 복귀하면 고작해야 2달 정도이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나 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든다. 쉬는 게 너무 좋아서 더 눌러앉게 되면 어쩌지? 그때 가서 생각해볼 일이다.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매달 25일 내 통장에 찍히는 일곱자리 숫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납득을 하지 못 하고 있다.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으면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껴질 것만 같다. 이것은 부지런 한 것도 아니고, 칭찬할 만한 일도 아니며, 일종의 강박이다.
이렇게만 보면 무척 우울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삶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결혼기념일 다음날엔 남편하고 호텔에 가서 맛있는 밥도 먹었고, 지난 금요일엔 친구들과 만나 (비록 2시간 지각했지만) 신나게 수다도 떨었고, 매일 아침 스페인어 공부도 37일째 하고 있고, 오늘 점심 시간에는 여유가 생겨 더현대 4층에서 맛있는 드립커피도 마셨다. 퇴근 길에는 바람이 좋아서 창문을 열고 운전하며 집에 왔다. 집에 오는 길에는 지름길로 오느라 산을 넘어 오는데, 풀 냄새와 얼굴에 닿는 바람의 느낌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