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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아기 워킹맘의 야근일지

by 일곱시의 베이글

밤 10시 30분. 아무도 집에 갈 기미가 안 보인다. "이사님, 저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어 그럼 그럼" 뒤도 안 돌아보고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떠났다. 내가 나왔으니 이제 다른 동료들도 하나 둘 눈치를 보다 떠날 수 있겠지. 오늘 딱히 급하게 마무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각자 맡은 보고서 작업이 있었고 나는 내일 오전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PM인 이사가 회식을 하고(술까지 마셨는데)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바람에 우리도 꼼짝없이 남아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야 내일 할 일 오늘 미리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긴 했는데 최저시급 받고 일하는 인턴은 좀 안쓰러웠다. 인턴은 초과근무수당을 준다고는 하지만 그거 안 받고 집에 가고 싶을 텐데 말이다.


인턴을 제외하면 야근을 해도 초과근무수당 같은 건 없다. 포괄임금제로 연봉계약을 맺기 때문에 야근을 모두 포함한 금액을 받는다. 그래서 컨설턴트들끼리는 자조적으로 근무 시간을 고려하면 최저시급도 안 되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프로젝트 초반에는 이렇게 근처에서 아침도 먹고 출근했는데 요즘은 눈뜨자마자 헐레벌떡 사무실로 가기 바쁘다.

어느덧 프로젝트에 들어온 지도 3주 차다. 이번 프로젝트는 IT솔루션 회사의 홈페이지 리뉴얼 전략을 수립하는 4.5개월짜리 업무다. 홈페이지 리뉴얼 구축 업무는 여러 번 해봤지만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처음이다.


브랜드 공식 홈페이지를 리뉴얼하기 위해서는 현재 홈페이지 현황을 파악하고 임직원 인터뷰를 통해 개선점을 도출해야 한다. 사이트 기획 단계에서는 정보구조도(IA, Information Architecture)를 그려서 큰 얼개를 잡고, 각각의 화면은 어떤 구성으로 만들어질지 와이어 프레임(wireframe)을 그린다. 이미지, 텍스트, 버튼 등 화면에 어떤 요소가 들어갈지를 보여주는 레이아웃이다. 여기에 콘텐츠를 입혀서 디자인을 미리 보고 테스트를 해보면서 사이트를 완성해 간다. 현업에서 홈페이지 리뉴얼 PM을 맡았을 때는 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했었는데, 이번에는 실제로 홈페이지를 오픈하는 것은 아니라 내부 의견을 수렴하고 벤치마크를 한 뒤 전략까지만 수립하면 되었다. 컨설팅펌인 우리 회사와 웹 경험이 많은 IT 에이전시, 목업 UX디자인을 담당할 업체가 프로젝트 팀을 꾸렸다. 우리 팀에서 전략 부분을 담당하는 동시에 프로젝트를 이끄는 PMO를 맡는다.


다시 야근 이야기로 돌아와서. 야근을 하는 이유는 산출물을 만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시간을 모두 쓴다. 오늘 오전에는 웹에이전시와 업무 범위에 대해 협의하느라 한참 시간을 보냈다. 서로 생각하는 산출물의 기대치가 너무 달랐고, 담당자 선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서 결국 에이전시의 상급 책임자들이 내일 와서 다시 회의를 하기로 했다.


오후에는 고객사 인터뷰를 이어갔다. 홈페이지 리뉴얼을 하기 위해서는 각 사업부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데, 인터뷰를 질문지를 짜고 내용을 정리하고 인사이트 뽑는 일을 컨설팅사에서 한다. 현업들은 회의에 배석해 귀만 열어두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코멘트를 한다. 하루에 4-5회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업무 시간에는 문서 작업 할 시간이 없다. 인터뷰는 보통 1시간씩 하는데, 인터뷰 질문지도 짜야하고 끝난 뒤엔 회의록도 써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턴이 있어서 회의록 작성에 대한 부담은 덜었다. 별거 아닌 듯 보여도 회의록 쓰는 것도 굉장히 큰 업무 부담이니 말이다.


낮에 안팎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회의를 마치고 5시 40분쯤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고객사 구내식당이 아주 훌륭해서 아침 점심 저녁을 잘 챙겨 먹고 있다. 가격도 싸고 메뉴도 다양하다. 나는 요즘 주로 샐러드를 먹는데 메뉴 중 샐러드도 아주 잘 나와서 만족하며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밥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니까. 우리는 저녁 업무를 앞두고 든든하게 배를 채우기 위해 내려갔으나 이곳 직원들은 발걸음 가볍게 퇴근길 식사를 테이크아웃 하고 있었다. 사내 어린이집도 있어서, 아이를 픽업해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는 직원들도 많이 보인다. 행복해 보인다. 나는 평일에 우리 아가가 깨어있는 모습을 길어야 2시간 정도 보는데, 같이 밥 먹고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지거나 현실을 비관하지는 않는다. 출산한 지 9개월밖에 안 된 워킹맘이 왕복 3시간 30분 거리로 출근하면서, 밤 11시까지 야근을 한다,라는 문장만 놓고 보면 가능한 일인가 싶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는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3주 차 정도 접어드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만을 갖지 않기로 마인드 세팅이 잘 된 듯하다. 우리 아이가 훌쩍 크고 난 뒤에 오늘을 돌이켜 보면 '그때 그 갓난쟁이를 집에 두고 어떻게 일하러 다녔지' 싶을 것 같기는 하다. 그 시점에서 9개월 된 아기는 너무너무 작고 소중한 존재일 테니. 그러나 현재를 살고 있는 내게 우리 아기는 지금의 모습이 가장 성장한 버전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를 지켜봐 온 내 입장에서는 너무 아기 같다는 느낌보다는 '언제 벌써 이렇게 컸지'라는 마음이 더 크다.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는 건 아기 아빠가 육아휴직을 하고 아기를 돌봐주기 때문이다. 조부모님이나 베이비시터에게 아기를 맡겼다면 훨씬 불편하고 힘들었을 것 같다. 아기 아빠가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나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아기를 24시간 붙어서 돌보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낮잠을 조금 잔다고는 하지만 그 시간엔 밥 먹고 집안일하기 바쁘고, 요즘에는 밤잠이 든 후에도 자주 깨서 육아퇴근도 들쑥날쑥이다. 밤잠에 든 후에 제발 깨지 않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저녁 시간을 보내지만 요즘은 거의 매일 깬다.


일하는 중간 중간 남편이 보내준 아기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힘을 낸다. 그런데 오늘은 작은 소란이 하나 있었다. 오후 4시경 고객사 현업을 포함해 10명 정도 배석한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내 휴대폰이 페이스톡 알림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왜 하필 오늘 내 폰은 벨소리로 되어 있었으며, 왜 하필 남편은 평소에 하지도 않던 페이스톡을 걸었을까. 나중에 들어보니 아기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서서 보여주려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여튼 벨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마자 바로 끈 뒤 회의 참석자들에게 "죄송합니다!!"를 외쳤다. 그냥 벨소리도 아니고 페이스톡 알림이라 더 민망했다. 고객에게는 사과를 했지만, 회의가 끝나고 팀원들끼리는 웃으며 그 일을 회상했다.


내일은 6시가 되면 퇴근을 해볼 예정이다. 남편이 직장 동료들과 오랜만에 회식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아기를 돌봐야 하니 바통 터치를 해야 남편이 나갈 수 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아기만 보면 고립감이 느껴지니 이렇게 가끔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게 좋아 보인다. 나도 혼자 아기를 보던 시절 그렇게 했었고. 이렇게 차곡차곡 시간을 쌓아가다 보면 아기도 훌쩍 커있지 않을까 싶다. 이상, 밤 11시 퇴근길 택시에서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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