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보고가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어제 현업 프로젝트 팀에 중간보고 스토리라인을 공유했는데 이 방향이 아니라며 와장창 깨지고 새로 스토리를 짜기 시작했다. 우리는 의사결정에 해당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부분들에 대해 숫자가 들어간 근거를 요구했고, 거기에 맞게 자료를 전면 수정해야 했다.
웹사이트 트래픽과 고객 행동 분석 부분을 맡아서 작업 중이다. 몇 주간 구글애널리틱스(GA) 데이터를 요리조리 돌려 보면서 인사이트를 찾고 있다. 현업에 있을 때는 GA를 통해 사용자, 조회수, 이탈률 정도만 봤었는데 여기서 요구하는 수준은 훨씬 깊다. 상품 1 관심 고객과 상품 2 관심 고객 사이에 크로스오퍼링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고객이 리드를 남기기 전 몇 단계의 여정과 어떤 페이지를 조회했는지를 파보고 있다. 인사이트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사실 대부분은 없다) 막연하게 GA창을 띄워놓고 이것저것 눌러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설을 세워놓고 검증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데, 꼭 맞는 데이터가 뽑히기란 쉽지 않다.
몇 년 사이에 GA의 세계관 자체가 바뀌었다. 내가 한참 GA 보던 때 있던 지표들이 사라지거나 의미가 바뀌어서 새로 공부를 하며 일을 하고 있다. 다행히 GPT라는 좋은 비서가 있어서 원하는 데이터를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물어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해본 분석들은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잘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 과장 보태어서 이것만 전문성을 잘 살려도 먹고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밤 9시에 미국 법인과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와 일을 하다 보니 밤 11시가 되었다. 내 장표에 대한 1차 피드백을 받고 수정 작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피엠은 모든 수치에 대한 벤치마크를 요구했다. 트래픽이 이 정도인데 큰 건지 작은 건지? 재방문율이 이 정도인데 높다 낮다의 기준이 있는 건지? 이런 부분은 데스크 리서치를 통해 보완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 인터뷰를 할 시간도, 예산도 없으니 말이다.
이번 피엠과 일을 같이 해본 액팅 피엠(실무적인 부분을 리드하는 사람)에게 나는 곧 가겠노라 선언했다. 편도 2시간 거리에 살고 있으며, 10개월 된 아기를 둔 워킹맘이라는 배경 정보가 있으니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했다. 이 야근이 오늘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앞으로 2주간 이어질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피엠하고 같이 프로젝트하는 동안 먼저 집에 가겠다는 사람 없었어요? 한 명도 없었단다. 그러면서 본인은 이 피엠이랑 같이 일을 하며 3주간 새벽 4시에 퇴근을 했다가 몸이 심하게 아파 휴직을 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집에 가겠다는데도 크게 말리진 않았다. 물론 말린다고 내가 안 갈 것도 아니지만. 다만 피엠이 나를 고깝게 볼 것이 걱정되었는지 12시까지만 하고 가는 게 어떠냐며 절충안을 제시했고, 그러마 했다.
약속의 12시가 되고 피엠에게 먼저 집에 가보겠다고 했다. 살짝 당황과 언짢음을 표시하며 그러라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뭐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고 떨렸을 거 같은데 딱히 그런 생각도 안 든다. 밤 12시에 집에 가겠다는데 허락이 필요한 건가? 이번 주 들어서는 이 일을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기에, 집에 간다고 말하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뭐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나면 단순해지는 것들이 있다.
놀라운 건 지금까지 그와 같이 일한 그 누구도 먼저 집에 가겠다는 말을 안 꺼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피엠도 컨설팅은 원래 이렇게 일하는 거라고 생각했겠지. 이 바닥이 이러니 못 버티고 떠나는 사람이 정말 많다. 내가 아주 여유 있는 상황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프리랜서 계약으로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있으니 아직 정직원이 아니다. 입사를 전제로 투입되어 프로젝트 도중 최종 면접을 보고 합격해 오퍼레터를 수락하고 입사 절차를 진행 중이니, 몸 사려야 할 시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12시 넘어서까지 일은 도저히 못하겠더라. 사람이 살고 봐야지. 12시에 집에 갔다는 이유로 팀워크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기꺼이 그러라 하겠다. 태도도 안 좋고 업무 능력도 부족하다면 회사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택시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강남순환도로에서 시속 165km로 집에 간다. 총알택시를 탈 때마다 부디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나는 직원이 아니니 교통사고 나면 산재 처리가 될까? 입사를 전제로 프로젝트에 선투입된 케이스는 잠정적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좌우지간 시간은 간다. 얼마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처럼 불편한 순간들을 피하지 않고 부딪혀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