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그 통제할 수 있는 세계의 즐거움

by 일곱시의 베이글

오늘 아침은 일진이 사나웠다. 날씨가 흐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유모차를 끌고 등원하려 집 밖을 나서니 빗물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기도 하고, 어린이집까지 도보로 5분이면 가니 그냥 가야겠다 싶었다. 유모차 캐노피를 씌워서 아이가 비에 맞지 않도록 하며 걸어갔다.


그 짧은 등원길에 연초 흡연자를 두 명이나 만났고, 좁은 인도의 정중앙에는 전동킥보드 한대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유모차를 세워두고 전동킥보드를 가장자리로 치우려고 들어 세웠더니 꽤 무겁다. 게다가 자기를 내려놓으라고 삐용삐용 소리도 울려댄다.(사용자 인증 없이 건드리면 안 되도록 뭔가 설정이 되어있나 보다.) 임신으로 제법 배가 불러온 터라 전동킥보드 하나 옮기는 데만도 낑낑거리며 힘에 부쳤다.


나야 걸어서 이걸 옮기면 되지만, 혼자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이 이렇게 길 중앙에 세워진 전동킥보드를 만났다면 오던 길을 되돌아서 지나가야 하겠구나 싶었다. 이렇듯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나마 생기게 된다.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좌우지간 나는 그걸 옮기다 운동화 끈이 풀려서 쪼그려 앉아 다시 메야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지만, 임산부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니 이유 없이 녹초가 되어버렸다. 흐린 날씨 탓인지, 아침에 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집에 와서 청소를 하고 아이 반찬을 만들 계획이었지만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어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30분 동안 스픽을 했다.


일어나야 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파워 각성제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일 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하는 맥심 모카골드 두 봉을 꺼내 텀블러에 담았다. 뜨거운 물을 넣어 커피와 설탕을 완전히 녹인 뒤 우유를 가득 부었다. 그리곤 텀블러를 쉐킷쉐킷. 잘 섞인 커피에 적당한 거품이 생겨 먹음직스럽게 되었다. 기다란 유리잔을 꺼내 커피를 담고, 얼음을 3개 정도 추가한 다음 예쁜 컵받침에 올려두고 꿀꺽꿀꺽 마셨다. 효과는 굉장했다. 10분쯤 지나자 몸을 움직일 활력이 생겼다.


냉장고를 열어 재고를 점검한다. 백김치 만들고 남은 알배추, 오늘은 네 녀석을 소진하기로 한다. 팬트리를 열어 보니 언제 산지 기억이 안나는 고구마가 네트백에 담겨있는데, 한 녀석이 이미 물러졌다. 긴급히 모두를 구출하여 이것도 써보기로 한다. 집에 있는 식재료를 입력하고 ChatGPT에게 유아식 반찬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배추된장무침과 고구마 샐러드를 만들어 보라고 한다.


고구마 샐러드와 배추 된장 무침

조금 더 만만해 보이는 고구마 샐러드 먼저 시작. 이유식 찜기 베이비무브에 고구마 두 개를 썰어 넣고 쪘다. 삶은 달걀도 넣어보면 좋을 것 같다. 활력이 생긴 김에 그냥 끓이지 말고 팬트리 구석에 있는 계란찜기를 꺼내서 써보기로 한다. 몇 년 전에 사놓고 한두 번 쓰고 방치해 뒀던 물건이다. 다시 쓰려고 보니 스테인리스에 얼룩이 생겼다. 구연산을 넣고 조금 끓여서 씻으니 말끔히 제거된다. 샐러드용이니 달걀은 완숙으로 했다. 찐 고구마에 삶은 달걀을 까 넣고 포크로 꾹꾹 눌러줬다. 식감이 좀 퍽퍽해서 우유를 부어주니 농도가 딱 맞다. 내 입맛에도 맛있다. 잘 먹어주기를.


두 번째는 배추된장무침. 배추를 아이가 먹기 좋게 작은 크기로 자르고, 끓는 물에 30초간 데쳤다. 물기를 뺀 다음 된장과 참기름, 참깨를 넣어 마무리. 처음 만들어보는 음식인데 생각보다 간단하고 맛도 괜찮았다. 만만해 보였던 고구마 샐러드는 각종 찌기로 인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무침은 뚝딱 완성됐다. 아이가 잘 먹어준다면 또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지난주에 만들었지만 실패해 버린 백김치에 비하면 내 입맛에도 괜찮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아침용 요거트를 만든다. 무가당 그릭요거트를 락앤락 이유식 소분용기에 담고 과일, 오트밀을 넣어서 완성한다. 오늘은 두 개를 만들 거다. 냉동 망고를 썰어서 하나, 냉장 블루베리를 넣어서 하나. 무가당이라 단 맛이 없어서 블루베리 버전에는 꿀도 조금 넣었다. 견과류도 들어가면 좋으니 갈아둔 마카다미아를 맨 위에 뿌려 마무리했다. 이건 전날 미리 만들어두면 좋은 메뉴다. 오트밀이 포리지라서 그냥 먹기에는 좀 푸석푸석한데, 요거트와 섞어 하루정도 냉장고에 두면 촉촉해져서 다음날 아침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과일만 매일 바꿔준다. 블루베리 / 딸기 / 멜론 / 망고 등 그때그때 냉장고에 있는 걸 이용해서 만드는데 딸기가 가장 반응이 좋았다.


과일 오트밀 그릭 요거트. 냉장고에 넣어뒀다 다음날 아침에 먹는다.


요즘 살림하는 재미에 빠졌다. 냉장고와 냉동실 재료를 정리하고 통일된 밀폐용기에 담아 라벨링까지 해놓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모양이 모두 다르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용기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모두 맞췄더니 관리하기 아주 편리해졌다. 유리 밀폐용기는 대부분 제품들이 좋지만, 글라스락 제품이 내부가 투명하게 잘 보이고 깔끔해서 이걸로 맞췄다. 아이 이유식 유리 밀폐용기는 락앤락 제품. 스타필드에 갔다가 별생각 없이 샀는데 막상 써보니 좋아서 온라인으로 추가 구매해서 쓰고 있다. 국이나 밥을 소분해서 냉동 보관하기에는 이렇게 작은 밀폐용기가 제격이다.


살림을 한다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만의 세계라 좋다. 회사 생활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현관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모든 일들이 변수이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다. 지연되는 지하철, 출근길에 만나는 빌런, 지연되는 프로젝트 일정, 그날그날 다른 상사의 기분 등 그 모든 것들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그저 내가 잘 받아들이는 것만이 방법이다. 그럭저럭 잘 수용하면서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있어 보니 그 시절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굉장히 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나, 많은 것을 견디고 있었구나. 언젠가는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야겠지만 지금은 내가 만든 이 작은 세계에서 복작복작 행복하게 지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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