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가 여행을 하면서 가장 큰 혼란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같은 또래들을 만나는 순간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도 여행자 대 여행자로서의 만남이 아닌 여행자 대 일반인으로서의 만남. 비록 내가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여행을 다닌 건 아니었지만 교복을 입은 그들 옆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기분이 묘했다. 분명 나와 같은 처지, 같은 환경 속에서 자라 온 아이들이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는 후드 티를, 그들은 교복을 입은 채로 그 길 위에 서있던 것이었을까.
일본에서도 내 또래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3대 규동집 중 하나로 유명한 (우리나라로 따지면 김밥나라쯤 되지 않을까) 마쓰야를 지날 때였다. 쓰루하시라는 곳을 찾아 오사카의 길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던 중에 보였던 마쓰야에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그들. 왜 이렇게 많이들 모여있나 하고 시계를 봤더니 오후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랬다. 점심시간이었다. 나에게는 시간의 개념 조차도 사라져 한 시가 되든, 두 시가 되든, 자꾸만 감해가고 있을 때, 그들은 지금 이 시간이 되기만을 간절히 빌고 있었다. 나도, 그들도 분명 나이와 자라 온 환경은 비슷했을 텐데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대척점 위에 서게 된 걸까. 이러한 경험은 방학기간이 다른 일본에서만 겪은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주도의 어느 바닷가가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종일 박혀있다가 무언가 살 게 있어서 잠깐 시청 앞 메인 거리로 나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가 1년 하고도 8개월 전 일이어서 사실 무엇을 사러 갔었는지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교복을 입은 소녀의 빠른 발걸음. 제주도 여행자들의 필수 아이템으로 불리우는 몸빼 바지를 시내에까지 끌어 입고 나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이곳저곳을 어슬렁 거리던 소년에게 정해진 일정에 맞춰 빠른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소녀는 이질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행자로서의 삶과 학생으로서의 삶.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나이. 물론 나도 며칠 뒤면 학생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이긴 했지만 그때만큼은 그녀가 그저 낯설기만 했다.
이러한 이질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걸까? 그건 아마 '열 띤 공부를 통해 다른 사람을 추격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 때문은 아닐까? 남들이 수능 공부와 내신관리에 매진하던 사이, 난 여행을 다녔다. 교사들이 계절과 학년을 막론하고 무조건 중요하다고 말하는 방학 때도, 주말에도, 그리고 체험학습 보고서와 함께였던 평일에도 여행을 떠났다. 그렇다 보니 남들과 똑같은 삶의 방식과 당연한 것들에는 자연스레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삶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교복'이었다. 중학생이 되던 날 처음으로 맞춘 소매가 덜렁덜렁한 교복이 5년이 지난 지금도 어색하기만 한 건 아마 학교라는 정해지고 짜여진 삶보다는 여행이라는 자유로운 삶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