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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재 Jun 01. 2022

파친코: 자본주의 스토리

경제 코드로 다시 읽은 애플TV+의 드라마 리뷰

오랜만에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애플TV+의 <파친코>였다.


이미 유명한 작품이고 많은 분들이 리뷰도 써 주셨다. 많은 분들이 한일관계의 역사와 디아스포라 문제에 대해 깊이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드라마를 봤다. 이야기 곳곳에 자본주의와 근대성과 시장경제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비판과 토론이 가득했다. 


<1> 시장에서 시작해서 시장으로 끝나는 드라마 구조


파친코는 시장에서 시작해서 시장에서 마무리되는 드라마다. 


1편 영도의 어시장에서 시작해서, 마지막편인 8편 오사카의 시장 좌판대에서 끝난다. 재일동포 아버지는 일본에서 파친코를 운영하고, 아들은 글로벌 파친코인 월스트리트에서 일한다. 


아버지는 파친코의 승률을 조작해 고객의 돈을 훔치고, 아들은 한국인 할머니를 구슬러(속여) 집을 팔게 만드는 임무에 자원해 나선다. 


각각 집안을 일으키고 회사의 이익을 일으켜 자신의 뿌리를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행동일 테다.


시장의 이윤동기는 양심도 팔고 민족도 팔게 만든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워질 테다.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정육점 주인의 이타심이 아니라 그 이기심 덕에 우리가 저녁 식탁에서 고기반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니. 


시장과 시장의 이론인 경제학이 우리 마음 깊이 심어둔 교리다.


영도의 시장에서 시작된 그 시장 이야기는, 오사카의 시장에서 열린 구조로 마무리된다.


<2> 영도 어시장의 시장주의와 근대성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 어시장에 등장한 새 생선중개상 고한수(이민호)가 그 웅변을 이어간다. 조선인 상인들을 포악하게 지배하고 착취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혹독하기는 하지만, 고한수가 하는 일은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일이다.


우선 제대로 된 물건을 팔게 한다. 속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큰 생선 아니면 팔지 못하게 한다. 씨를 말리면 안 된다는 취지다. 성과가 나는 상인에게는 확실히 보상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혹하게 처벌한다.


특히 일하며 기여하지 않고 ‘상놈들’ 것 빼앗아 먹고 사는 땅부자들을 고한수는 혐오한다.


고한수의 모습은 근대적 시장 질서와 만난다. 고한수는 시장 질서를 바로잡고 있다.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는 근대적 시장의 가치다. 근대적 시장경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이다. 민주주와와 자유주의도 근대적 시장에서 만난다. 민주주의적 개인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계약을 맺고, 모든 경제활동은 계약에 의거해 이뤄진다.


전근대적 사회에서의 시장은 다르다. 특권의 공간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나쁜 물건을 높은 가격에 사도록 강요할 수 있다. 가지지 못한 자는 높은 가격에도 좋은 물건을 살 수 없다. 친소관계에 따라 계약은 휴짓조각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근대적 사회에서 속임수는 없는 자들의 최소한의 저항이다.


또한 근대적 시장에서 경제주체들은 미래를 계획하며 투자한다. 오늘 양식을 오늘 다 소비해버리지 않는다. 고한수는 그래서 작은 생선을 어시장에서 팔지 못하게 한다. 큰 고기만 거래하고 작은 것은 남겨두어야 훗날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게 근대적 시장의 투자 마인드다.


그러나 전근대적 사회는 그럴 여유가 없다. 일단 소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긁어모아 오늘 먹어야 한다.


고한수는 이런 전근대 사회를 혐오한다. 그래서 영도의 어시장, 조선을 혐오한다. 그에게 일본은 근대이자 시장경제이다. 그 시장질서를 어시장에 심는 게 그의 임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합리화한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러 온 게 아니라, 근대가 전근대를 가르치러 왔다고.


<3> 선자 vs 고한수, 내재적 발전론 vs 식민지근대화론

고한수의 웅변은 IMF가 1997년 국가부도 위기를 맞은 한국에 가져왔던 교리를 담고 있다. 근대적 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의 향기가 가득하다. 생산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비효율적인 자들은 자리를 비켜라. 


고한수는 조선의 상인도 혐오하고, 지주도 혐오한다. 전근대적인 민중, 전근대적인 유한계급이라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윤리>를 떠올려 보자. 자본주의의 미덕은 근면과 생산이다. 시장경제의 투명성과 공정성은 근면하게 생산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게 해주는 매커니즘이다.


고한수가 보기에, 조선은 그게 깨어진 사회다. 근면하지도 않고 생산도 하지 않는 지주들이 떵떵거리며 산다. 일본이냐 조선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근대냐 전근대냐, 자본주의냐 봉건주의냐가 문제다.


재산과 특권을 깔고 앉아 호의호식하는 지주든, 생선 크기를 속여 한 푼 더 벌려 기를 쓰는 가난한 상인이든 상관없다. '효율성'의 깃발을 든 구조조정 대상이다.


그들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들이 비도덕적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비효율적이어서다. 그들이 비켜야 조선이 발전하고, 한국이 전근대적 위기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다. 고한수와 1997년의 IMF가 공유하는 교리다.


사실 고한수의 논리는 식민지근대화론과 닮았다. 이는 안병직의 이론이기도 하고,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다.


핵심은 다음과 같다. 조선 후기 사회는 전근대성으로 인해 자멸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선진 제도가 도입되고 자본이 투입되었으며, 이때 축적된 경험과 자본이 해방 뒤 한국 경제 고도성장의 배경이 됐다.


선자는 고한수에 반박한다. 핵심은 이 대사 안에 있다. “작은 것까지 잡아 없애면 나중에 찌끄레기만 남는다는 이야기 아입니꺼.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 찌끄레기 갖고 장사하고 있다 아입니꺼.”


즉 근대적 시장경제도 좋고, 작은 생선은 남겨두어 앞으로를 기약하는 것도 좋지만, 그 모든 것이 이뤄진다 해도 그 과실은 조선인의 것이 될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일제의 수탈로 인해 이미 좋은 생선은 모두 빼앗긴 상태라는 이야기다.


선자의 시각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내재적 발전론과 맥이 닿는다.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맹아는 이미 조선 후기에 있었다는 시각이다. 그러던 것을 일본이 들어와 오히려 파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는 근대적 시장경제가 도입되던 시기가 아니라, 근대자본주의의 싹을 자르던 시기였다는 평가다.


<4> 고한수의 자본주의, 모자수의 자본주의, 솔로몬의 자본주의

1989년의 한국계 투자은행가 솔로몬은 고한수의 꿈을 이어받았다. 세계로 진출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꿈이다.


선자 앞에서 바위에 세계지도를 그리며 넓은 세상을 보라고 외치는 고한수가 동경하던 세계주의를, 솔로몬은 몸으로 실천했다.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 그 정글의 삶에 뛰어들면서다.


솔로몬은 시장에서 성공하고 싶다. 그러나 월가의 보이지 않는 차별은 높은 벽을 친다. 유색인종이 승진하는 길은 여전히 좁고도 좁다. 아무리 성과를 내도 승진이 어렵다.


그래도 '진정한 신자유주의자' 솔로몬은 승부를 시장에서 실력으로 내려고 한다. 


월가에서 실력이란 돈이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솔로몬은 자신의 정체성을 팔아 그 힘을 얻어내고자 한다. 


도쿄의 거대한 개발 예정 구역에서 마지막 남은 작은 집을 지키며 ‘알박기’를 하고 있는 한국인 할머니. 그 할머니를 설득해 땅을 팔게 만드는 임무에 자원한다. 뉴욕을 떠나 도쿄로 간다.


개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팔아 성과를 내기로 한 것이다. 월가 사람이 되고 미국 사람이 되고 글로벌 시민이 되기 위해서, 정체성을 팔기로 한다.


조선을 떠나 일본인이 되었고, 이제 세계로 가겠다는 고한수의 꿈과 통한다.


모자수(솔로몬의 아버지)의 전략은 다르다. 해방이 되었지만 재일동포인 그들은 여전히 근대 속 전근대에 산다. 일본에서 조선인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는 없다. 레토릭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어찌 보면 파친코는 가장 엄격한 확률의 공간이다. 이기거나 지거나, 확률만이 승부를 지배한다. 어떤 협잡도 전근대적 권력도 개입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도 약자들은 전근대적 생존전략을 짠다. 아버지 모자수의 승률 조작은 바로 그 전략의 일환이다.


모자수는 파친코 승률을 조작하고, 솔로몬의 여자친구 하나는 교복을 입은 채 편의점에서 도둑질을 하면서 소심한 저항을 실천한다.


근대적 시장경제의 화려한 공정성 레토릭과 달리, 여기서 약자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체득한 이들의 저항이다. 법을 지키고 규칙을 지키면서 약자들이 시장경제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이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가능할 때 취해야 한다. 규칙을 지키거나 미래를 위해 투자하자는 건 약자를 지배하는 질서를 지키려는 강자들 레토릭일 뿐이다. 약자들의 책임이 아니다.


영도 어시장에서 ‘찌끄레기로 장사하는’ 조선인들이 하던 행동, 바로 그대로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 주변화시키는 행동이기도 하다. 영원히 주류가 될 수 없도록.


솔로몬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그 벽을 넘어서려는, 다른 전략을 취한다.


<5>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젊은 선자(김민하)가 아이를 임신한 채 고한수의 헤어진 뒤, 새로 결혼해 오사카로 떠나기 전날이다. 선자의 어머니는 조선인에게는 팔지도 않는 조선 쌀을 몰래 구해 밥 두 그릇을 정성스레 짓는다. 한 그릇은 선자 몫, 다른 한 그릇은 남편 몫이다. 


(아마도)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한 쌀밥 밥상을 받은 선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 밥을 먹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어머니의 한이 담긴 결혼 선물이다.


수십년 뒤, 솔로몬은 친할머니인 선자(윤여정)을 앞세워 주택 매각을 설득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도쿄의 집주인 할머니가 방문한 이들에게 밥을 차려 내놓는다. 한 입 떠넣은 선자는 바로 조선쌀임을 알아챈다. 


오사카로 떠나기 전날 밤을 떠올리며 눈물에 젖는다.


가장 시장주의적인 성공을 구하는 솔로몬이 민족 정체성까지 팔아 자본주의적 성공을 구하러 간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비본주의적인 밥상이 차려진 셈이다. 시장에서 교환해야만 가치를 인정받는 자본주의의 교리를 벗어나, 돈으로 바꿀 수 없는 맛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조선 쌀맛은 조선인만이 안다.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선자의 기억 속 선자 어머니의 쌀밥 맛은 선자 본인만이 안다. 시장에서 교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밥상 앞에서 자본주의의 교리, 시장의 효율성 논리는 반박된다.


어쩌면 가장 비자본주의적인, 가장 비시장적인,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것,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 셈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번 시즌을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보신 분들은 어떤 장면일지 짐작하시겠지요 ^^)


<6> 기업가정신

하지만 선자가 결국 돌아가는 곳은 시장이다.


남편은 구속되고 생계를 부양해주던 형부는 해고되자, 말도 통하지 않는 오사카에서 식민지 백성이 오직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시장에 나가 물건을 파는 일이었다. 생산자가 되어 거래하는 일이었다.


선자는 김치를 담궈 수레에 싣고 시장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냄새난다며 피하던 사람들 속에 구박받으며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결국 김치는 팔리기 시작한다. 선자는 신이 나서 큰 소리로 김치를 알린다. 선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의 제품이 드넓은 시장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시장이 우리를 배신할 지라도, 결국 우리를 차별하지 않을 곳도 시장이다. 유용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 즉 생산 앞에서 시장은 공정하기 때문이다. 


모자수나 하나와 달리, 선자의 저항은 파괴가 아니라 생산이었다. 시장을 속이는 대신 시장과 맞닥뜨리는 것이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맨 땅에 머리를 부닥치며 없는 수요를 만들어내는 '기업가정신'이 바로 그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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